러시아 시베리아에서 페스트(흑사병) 발생 가능성이 제기되자, 전 세계적으로 공포감이 확산한다. 페스트는 중세 유럽인 최대 2억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아직도 백신이 개발되지 않아 조기 치료가 최선이다. 과연 페스트는 얼마나 치명적이고, 확산 위험성은 얼마나 될까.
7일 엄중식 가천대 길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실험실에서 페스트가 노출된 게 맞다면 항생제(스트렙토마이신이며·겐타마이신·퀴놀론·독시사이클린 등)로 조기 진압할 수 있어 큰 '아웃브레이크'(질병 대유행)가 생길 일은 별로 없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하지만 누군가가 만약 페스트를 생물테러(생화학 테러) 목적으로 개발했다면 대규모 감염·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앞서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탄저균 테러'는 생물 테러의 대표 사례로, 상원의원과 언론인에게 발송된 편지에 들어있던 탄저균 포자(가루)가 살포되면서 피해가 발생했다. 당시 개봉한 편지에서 흩날린 흰색 가루를 마신 사람 중 5명이 사망하고, 17명이 탄저균에 감염돼 치료받았다.
엄 교수는 "최근 여러 연구소에서 페스트균을 가진 경우가 있지만, 이는 주로 치료제·백신을 연구·개발하기 위한 실험 목적"이라면서 "그렇지만 페스트균은 탄저균처럼 생물 테러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균주로, 실제 그런 목적으로 가진 경우도 있다는데 설령 맞더라도 (해당 연구소에서)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발표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페스트는 페스트균(Yersinia pestis, Y. pestis)에 감염되면서 발생하는 급성 열성 인수공통 감염병이다. 러시아 현지 언론들에 따르면 러시아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지역의 페스트 연구소에서 근무하던 28세 여성 다리아 시필로바가 지난달 25일 폐렴형 페스트 병원균이 담긴 시험관을 깨뜨렸고, 4일 뒤인 29일 심한 폐렴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이달 초 사망했다. 현지 언론은 시필로바가 '폐렴형 페스트'에 감염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페스트는 △림프절형 △패혈증형 △폐렴형 페스트 등 3종으로 나뉘는데, 이 중 치명률이 가장 높고 사람 간 전파력이 가장 강력한 게 폐렴형 페스트다. 폐렴형 페스트는 페스트균이 폐를 침범하는 형태로, 감염자의 기침·재채기 등을 통해 사람 간 전파가 가능하다. 알려진 세균 질환 중 독성이 가장 강하고 치명적이다.
엄 교수는 "페스트는 여러 장기 침범할 수 있는데 가장 치명적인 게 폐로 가는 것"이라며 "페스트균 잠복기는 보통 1주일 이내로, 항생제 치료를 최대한 빨리 시작해야 하는데, 증상이 발현되고 치료 시작 시점이 늦어지면 항생제를 써도 폐렴형 페스트의 예후는 좋지 않다"고 설명했다.
폐렴형 페스트에 감염되면 오한·발열·두통·근육통·쇠약감·어지럼증·흉통이 갑자기 시작된다. 기침·호흡곤란·객혈 등의 호흡기계 징후는 보통 발병 2일째에 나타난다. 치료하지 않을 경우 페스트의 치사율은 50%가 넘는다.
문제는 폐렴형 페스트의 증상이 감기·독감과 비슷해 조기 진단을 놓칠 수 있다는 것. 엄 교수는 "페스트균에 노출됐다는 사실을 빨리 알고 치료를 시작하는 게 관건"이라며 "의도적으로 덮으려 했거나 감염자가 페스트균 감염 사실을 몰랐다면 사망률이 높아진다"고 경고했다.
러시아 국가 공중보건 및 소비자 보호 기관인 로스포트레브나드조르는 공식 성명을 통해 해당 여성이 "원인 불명의 폐렴"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러시아 당국은 이르쿠츠크 지역에서 페스트가 발생했다는 사실을 공식 확인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엄 교수는 "지역사회에서 발생한 폐렴도 원인 병원체가 정확히 발견되는 비율은 절반밖에 안 된다"며 "해당 사망 연구원에게 폐렴이 생긴 원인 병원체를 파악하기 어려워 원인 미상이라고 발표했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이번 사건에선 정황상 실험실에서의 '이벤트'(폐렴형 페스트 병원균이 담긴 시험관을 깨뜨린 것)가 사망 원인일 것으로 보인다"며 "만약 실험실에서 페스트에 감염된 게 맞다면 흡입으로 인한 폐렴형 페스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러시아 현지 독립매체는 숨진 연구원이 사망 전 이송됐던 병원에서 접촉한 약 200명이 격리 관찰 대상자로 지정됐으며, 격리 조처가 내려진 시내 산부인과 병원도 있다고 보도했다. 엄 교수는 "접촉자들은 아마 증상 없이 격리된 상태에서 예방적 항생제(독시사이클린·시프로플록사신 등)를 먹고 있을 것"이라며 "이 경우 페스트의 지역사회 전파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