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대에 들어 유럽 전역에선 소규모 스포츠 행사가 개최돼왔다. 유럽의 교육자들은 여러 나라 청년들이 함께 운동경기를 하면서 세계평화 정신을 공유할 수 있는 이벤트의 필요성을 느꼈다.
윌리엄 페니 브룩스 박사와 피에르 드 쿠베르탱 남작은 이를 위해 전세계 국가가 여러 스포츠 경기를 하는 '무엇'을 만들기로 한다. 이들이 선택한 것은 이교도의 종교행사로 지목돼 393년 이후 폐지된 '올림픽의 부활'이었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쿠베르탱은 민간후원자를 물색한 끝에 그리스 사업가인 자파스 일가의 자금지원을 받아 경기장 건설을 비롯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스 국민들도 대회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헌금운동을 벌였다.
대회 초청장은 쿠베르탱이 직접 작성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들도 많은 선수를 참가시키기 위해 전세계를 누비며 유치작전에 들어갔다.
이 같은 노력 끝에 120년 전 오늘(1896년 4월6일) 그리스 아테네 파나티나이코 경기장에서 6만여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리스 국왕 게오르기우스 1세의 공식 개막 선언으로 제1회 올림픽이 개최됐다.
IOC에 따르면 당시 14개국 총 241명의 선수가 참가했다. '인류 평화의 제전'이라는 구호에 걸맞지 않은 조촐한 규모였다. 참가 국가를 살펴보면 △그리스 230명 △프랑스 19명 △독일 19명 △미국 14명 △영국 8명 △헝가리 8명 등으로 대부분 유럽국가였다.
1회 올림픽에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가 참가하지 않았다. 게다가 참가 선수들은 모두 남자로 구성됐다. 여자들은 다음 대회인 1900년 파리 올림픽 때 테니스와 골프에만 출전할 수 있었다.
대회 종목은 육상·수영·체조·사격·레슬링·역도·사이클·펜싱·테니스 등 총 9개, 세부적으로 43개 종목으로 나눠졌다. 크리켓과 축구는 참가팀 부족으로 취소됐고, 조정과 요트는 날씨가 좋지 않아 취소됐다.
최초 우승자는 개막식 당일 벌어진 삼단뛰기에서 우승한 미국의 제임스 코널리였다. 하버드대 신입생이었던 그는 무단결석을 한 채 자비로 화물선을 타고 출전해 육상 세단뛰기에서 13m71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당시 올림픽에선 1위 입상자에게 금메달이 아닌 은메달과 올리브가지를 수여했다. 2위에겐 동메달과 월계수가 주어졌다. 3위를 한 선수에게는 메달이 주어지지 않았다. 1·2·3위에게 금·은·동메달이 주어진 것은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부터였다.
이후 올림픽은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4년마다 개최되면서 지구상에 있는 거의 모든 국가가 참여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33개 종목과 약 400개 세부종목에서 1만3000명이 넘는 선수가 겨루는 최대 스포츠 이벤트가 된 것.
하지만 1980년대부터 국제적 스폰서를 맞아들이고 TV 중계권료를 받으면서 철저히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개최국이나 개최도시에서 올림픽 경기장 건설 등으로 막대한 비용을 들인 뒤 개최 후유증을 겪는 반면 IOC는 당연하게 올림픽에 대한 모든 권리와 수입을 독차지하면서도 배분에는 인색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