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을 견뎌낸 건축물은 때론 그 어떤 유산보다 더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해준다. 당대 건축양식은 물론이고 거주하던 인물의 특징과 생활상, 지리적·역사적 의미를 찾아볼 수 있는 데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건축물에 새겨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책 '일제의 흔적을 걷다'는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있는 일제강점기의 흔적을 좇는다. 서울 남산과 용산 일대에서 시작해 근대화의 관문이었던 인천, 목포·군산·여수 등 호남 일대, 대한해협과 맞닿아 있는 부산과 제주도까지 훑었다. 일본의 흔적은 방공호 혹은 군사진지의 모습으로, 조선인을 상대로 경제를 수탈하는데 앞장선 은행이나 일본인 유지의 가옥과 금고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광화문 광장에서 불과 600m떨어진 곳에 있는 대규모 방공호가 대표적이다. 1995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앙청'으로 불리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폭파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상징이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운 곳에 여전히 일본의 흔적이 살아 숨쉬고 있던 셈이다.
경희궁 흥화문으로 들어가 숭정문 오른편의 언덕을 넘어가거나 서울 역사박물관 뒤쪽의 2차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바로 이 방공호를 만날 수 있다. 혹자는 조선총독부 직원의 대피용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대규모 통신설비를 갖춘 사령부용 건물이라고 주장한다. 현재는 서울역사박물관이 사전 신청을 받아 일부 모습만 공개하고 있다.
'케이블카'와 '남산타워'로만 알려진 서울 남산에는 일본의 신을 모시던 신사의 잔재도 흩어져있다. 이태원의 '경리단길'과 함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는 해방촌은 사실 일본인들이 떠난 뒤 해방 이후 갈 곳을 잃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된 장소다. 해방촌에 남아있는 일본식 가옥에는 광복과 함께 월남한 실향민 등이 모여 살았다.
경제적 약탈의 흔적도 있다. 인천의 개항누리길에 남은 일본의 은행건물을 살펴보면 일본이 '화폐와 금융'이라는 보이지 않는 무기를 앞세워 조선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침략했는지 보여준다.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한 제주도 성산일출봉 절벽엔 일본군이 파놓은 동굴진지가, '근대문화도시'로 알려진 군산 시내에는 일본인 지주의 금고 건물이 서 있다. 부산 가덕도의 일본군 탄약고는 한국전쟁 당시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의 거처로 사용되기도 했다.
저자는 각 흔적을 방문해 사진으로, 글로 꼼꼼히 기록했다. 각 장소가 지니고 있는 내력과 그 이면에 자리 잡은 이야기를 다채로운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당시 그 장소에서 일본이 달성하고자 하는 야욕이 무엇이고 조선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자 했는지 흔적을 통해 유추해낸다. 독자들이 직접 현장을 가볼 수 있도록 각각의 장소를 찾아가는 길을 상세히 안내한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역사를 잊어버리면 또다시 반복된다"고 강조한다. 남아있는 일본의 흔적을 둘러보는 것은 '아픈'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 일제의 흔적을 걷다=정명섭·신효승·조현경·김민재·박성준 지음. 더난출판 펴냄. 403쪽/1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