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범죄 넘어 세계화의 주역인 ‘밀수’

김고금평 기자
2016.10.22 03:10

[따끈따끈 새책] ‘밀수이야기’…물건에서 사상, 문화, 기술까지 이어진 ‘밀수의 역사’

‘밀수’하면 손사래를 치는 이들이 직관적으로 느끼는 이미지는 ‘불법’, ‘범죄’, ‘사회적 병폐’ 같은 부정적 단어들이다. 전쟁에서 사용되는 무기들, 골목길이나 인터넷에서 은밀히 거래되는 마약류, 범죄 조직의 인신매매 같은 중대 범죄들이 모두 밀수와 연관돼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도덕심을 가진 인간조차도 벌이는 ‘최소한’의 밀수는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가장 먼저 만나는 일상의 밀수 현장은 인천국제공항 출입국 관리소. 600달러 이상 구매하고도 세관을 피하려고 물품의 태그를 떼어낸 경험, 한 번쯤 있지 않은가? 인터넷에서 구매한 짝퉁 명품, P2P 사이트에 올라온 영화나 음악 파일도 마찬가지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밀수꾼’인 셈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밀수에 가담한(?) 이들의 밀수품 교역 규모는 약 10조 달러(1경 1232조 원)로 추정된다. 밀수를 단순히 범죄 행위 맥락에서만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다. 돌이켜보면, 밀수꾼 조상이 없었다면 현재 우리가 누리는 삶도 존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통일 신라 흥덕왕 때 중국으로부터 차를 밀수한 김대렴과 고려 공민왕 시절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밀반입한 문익점 등 ‘위대한 밀수꾼’이 없었다면 삶의 질이 현격히 떨어졌을 것이다.

이 책은 밀수의 거의 모든 형태와 그 일에 뛰어난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저자인 사이먼 하비 교수는 사료 조사와 분석에 그치지 않고 직접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서인도 제도, 북아프리카 등을 돌며 밀수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15세기부터 21세기까지 장장 7세기 밀수 역사를 다룬 이 책은 밀수라는 ‘범죄’가 세계 정치, 경제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냈는지 주목한다.

밀수는 눈에 보이는 ‘물건’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기술, 문화, 사상 등이 모두 포함돼 있다. 기술 밀수의 최고봉은 영국에서 꽃피운 산업 혁명을 통째로 밀수한 미국이다. 미국은 이 여세를 몰아 밀수 교역 중 가장 사악한 것으로 알려진 무기와 마약 밀수에도 관여했다. ‘이란-콘트라 스캔들’은 로널드 레이건 정부 때 CIA를 주축으로 적대국으로 분류한 이란에 무기를 공급하고 중앙아메리카 마약 밀수에 개입해 벌어들인 돈으로 니카라과의 사회주의 정권에 대항하던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

앞서 15, 16세기 대항해 시대에 영국 엘리자베스 1세는 세계 일주 항해를 시작하는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은밀히 불러 ‘함선에 가득 채워서 돌아오라’는 임무를 잊지 않았다. 여왕의 주문은 스페인이 독점하던 향신료의 밀수였다. 역사는 ‘탐험의 항해’라고 쓰고 있지만, 현실은 ‘밀수 탐방’이었던 셈. 지난 세기에서 ‘밀수 강국’은 아이러니하게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다.

혁명은 ‘사상의 밀수’가 만들어낸 가장 위험한 도발이었다. ‘만인은 평등하다’는 명제로 시작한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은 왕정 체제를 유지하려는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선 용인할 수 없는 위험한 생각이었다. 이런 사상의 밀수로 ‘혁명’은 시작됐다. 조선 말기 천주교 사상 역시 중국에서 밀수된 선교사 존 로스의 한글 번역판 성서의 유통으로 촉발된 것이었다.

책에선 밀수를 넘어 스스로 혁명가가 된 밀수꾼, 마약 밀수로 벌어들인 지저분한 수익을 고가의 예술품 수집이라는 세련된 방식으로 소비했던 남아메리카 마약 중개인 등 재미와 감동으로 버무린 밀수꾼의 이야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또 인종 말살 정책까지 써가며 타국의 밀수를 통제하려 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중국의 아편 밀수를 독점하려 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 등 국가 권력이 직접 밀수에 뛰어든 사례도 소개된다.

하비 교수는 “밀수가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이 세계를 변화시켰고 지금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며 “밀수는 무역과 경제의 역사이자 세계화의 과정”이라고 말했다.

◇밀수이야기=사이먼 하비 지음. 김후 옮김. 예문아카이브 펴냄. 516쪽/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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