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한국정신문화유산, 보존·활용방안 마련해야

조현재 한국국학진흥원 원장
2019.05.28 03:46

[기고]조현재 한국국학진흥원장(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

조선은 문(文)을 중시하는 ‘기록의 나라’였다. 그런데 혼란스러웠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수많은 기록들이 멸실되었고, 언제부턴가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기록이 부족한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다. 기록유산은 크게 궁중을 중심으로 왕실과 공무에 관련된 국가기록과, 세간에서 생산하고 유통된 민간기록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국가기록물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보존정책이 세워지고 국가기록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 등에 막대한 지원을 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민간기록물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정책이나 대책이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다. 국가기록물보다 더 열악한 조건에 몰리며 멸실되어가는 민간소장 기록유산에 대한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에 한국국학진흥원에서는 민간소장 기록자료의 전문적인 보존, 관리를 위해 소장자의 소유권을 보장하고 관리권만 위임받는 ‘기탁제도’를 운영함으로써 짧은 기간 안에 52만5000여 점(2019년 5월 현재)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소유권은 그대로 보장하면서 관리와 번역, 연구, 활용 등의 사업을 해나감으로써 기록유산 소장자와 관리기관이 상호 상생하면서 전통문화 기반의 다양한 활용사업을 수행해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2002년부터 유교책판 10만 장 수집 운동을 시작하였고 2015년 10월 10일 308개 문중 등에서 기탁한 718종 6만4천226점의 유교책판이 한국의 12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성과로 이어졌다. 또한 일반적으로 현판 등으로 불리는 '한국의 편액'이 2016년 5월 19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에 등재되었고, 2018년에는 공론정치의 원형이자 유교적 실천운동의 상징인 '만인의 청원, 만인소'가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지역 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기록유산에 대한 또 다른 위험요인은 자연재해와 산불 등에 의한 멸실이다. 남대문, 낙산사, 향일암 등이 화마에 의해 소실되고 훈민정음 해례본이 주인을 잃고 화재로 훼손되는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기록유산을 수집하는 것과 더불어 이를 안전하게 보존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이다. 이에 대해서는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할 것이며, 한국국학진흥원에서도 귀하게 수집한 52만5000여 점의 민간소장 기록자료를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년 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안동 방문에 이어 여왕의 차남인 앤드루 윈저 왕자가 안동에 다시 들렀고 지난 14일에는 한국국학진흥원을 찾아왔다. 앤드루 왕자는 안동 방문의 마지막 장소로 세계기록유산 유교책판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을 택한 것이다. 앤드루 왕자는 세계기록유산이 보관된 장판각을 둘러보았으며 직접 목판 인출 과정을 체험하였다.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하기로 이름난 영국의 왕자가 한국국학진흥원의 세계기록유산에 주목하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21세기 문화전쟁의 시대를 맞이하여 이렇게 수집한 자료를 안전하게 보존만 하는 것은 직무유기라 할 수 있다. 한국정신문화의 고갱이로서 기록유산에 대한 체계적인 정리, 번역, 디지털 DB화, 콘텐츠화 등이 절실한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수집된 기록유산의 번역사업에 대한 현재의 사업규모나 지원은 열악하기 그지없다. 한국정신문화의 보고인 기록유산에 대한 번역률이 두 자릿수에도 채 미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따라서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기록유산에 대한 보존을 넘어 중장기적인 로드맵 하에 디지털로 가공하고 번역함으로써 불의의 사고로 인한 멸실에도 대비하고 기록유산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신(新) 한류 콘텐츠를 창조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문학, 만화, 드라마, 광고, 영화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는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한 스토리테마파크 컨퍼런스는 데이터베이스(DB)화 한 일기류 등 민간기록에 담긴 창작소재를 발굴하고 우수한 콘텐츠로 창작해나가고 있다. 축적된 기록유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플랫폼이 적극 개발되고 실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조현재 한국국학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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