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번아웃인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온다" "카메라 앞의 유승호와 혼자 있을 때의 내가 다른 것 같다. 혼자 있는 게 이상해서 눈에 보이는 건 다 해봤다. 배달 일도 해봤다"-배우 유승호
"내가 요즘 딱 그렇다. 나는 스스로를 '로우텐션 병'이라고 부른다. 잘 돼도 크게 기쁘지 않고, 안 돼도 크게 슬프지 않다"-PD 나영석
최근 한 유튜브에 출연한 배우 유승호와 나영석 PD가 나눈 대화다. '도파민 과잉' 시대에 절여진 탓에 일상의 작은 즐거움에 둔감해져 성취감이 줄어들고 무기력감이 커진 걸까. 불혹으로 향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나이 탓인 걸까. 기자도 나영석 PD와 비슷한 증상을 느끼던 차에 로우텐션 병(?)에서 벗어나고자 '강남구협회장배 복싱대회'에 덜컥 참가 신청을 해버렸다. 기자의 취미는 복싱이고 첫 생활체육대회(이하 생체) 도전이다.
첫 생체를 준비하면서 총 세 번의 스파링이라는 시험대에 올랐다. 링 위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본능적인 공포를 이겨내고 나 자신을 증명해가는 치열한 기록이었다.
◇첫 번째 스파링: 3분은 왜 30분처럼 흐르는가
첫 스파링 상대는 탄탄한 복근을 가진 아이 엄마였다. 스파링 시작 종이 울리자마자 쏟아지는 상대의 펀치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3분씩 2라운드, 그 짧은 시간이 링 위에서는 마치 30분처럼 길게 느껴졌다. 연타를 맞아 고개가 뒤로 꺾이는 충격에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를 꽉 물며 2라운드를 버텨냈다. 그동안 배운 기술은커녕 숨쉬기조차 벅찼던 첫 경험은 며칠간 목을 가누기 힘들 정도의 육체적 통증과 아쉬움이라는 마음의 멍을 남겼다.
◇두 번째 스파링: 공포가 '깡'으로 변하는 순간
두 번째 상대는 키 170cm의 장신인 20대 여성이었다. 첫 스파링에서 호되게 당한 덕분일까, 아이러니하게도 내 안에는 '깡'이 생겼다. 신체 조건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기죽지 않고 주먹을 냈다. 물론 안 좋은 습관들이 마구 튀어나왔지만, 적어도 상대의 주먹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는 얻은 값진 시간이었다.
◇세 번째 스파링: 연타의 쾌감, 안 되던 기술이 먹혔다
세 번째는 기자의 키(157cm)와 비슷한 20대 여성과 마주했다. 그간의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몸은 가벼워졌고,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위, 아래 섞은 연타와 보디 공격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 성장에 놀라던 찰나, 막판에 힘들어하는 상대의 눈빛과 마주쳤다. 순간 마음이 약해져 주먹 끝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대회 당일엔 마음을 굳게 먹고, 보다 더 냉철해야겠단 다짐을 했다.
링 위에 오르기 전, 복서에게 가장 먼저 찾아오는 상대는 적수가 아닌 '체중계'다. 키가 작은 편인 기자는 5주간 4.4kg 감량 목표를 세웠다.
◇감량 없이 -55kg급으로 나갈걸...후회와 증명의 사이
즐겨 먹던 과자와 술을 끊고 식단 관리를 철저하게 했다. 2주 동안 체지방 2.5kg을 깎아냈지만, 그 후 2주간 체중계 바늘은 요지부동이었다. 프로복싱 선수인 강경민 언더그라운드복싱 관장은 "대회 전 이틀이면 싹 다 뺄 수 있다"며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초보 복서는 매일 매시간 불안에 시달렸다.
혹시 체중계가 고장인가 싶어 6kg짜리 케틀벨을 체중계에 올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체중계는 정확하게 '6kg'을 가리키며 기계적인 진실만을 말해줄 뿐이다. 고장은 없었다.
◇고독한 식단과 '방해꾼' 남편(?)
식단은 고행의 연속이다. 아침 식사는 오버나이트 오트밀, 점심 식사는 회사 동료들과 떨어져 고독하게 포케나 샌드위치 또는 샐러드를 먹었다. 가끔 회사 동기들과 시간이 맞는 날엔 그들이 샐러드를 같이 먹어주기도 했다(동기 사랑 나라 사랑!). 저녁 식사는 주로 간단한 그릭요거트나 삶은 달걀을 먹었고 컨디션이 안 좋을 땐 구운 양배추와 닭가슴살, 김치, 소량의 밥을 먹었다.
반려자가 있는 집은 또 다른 전장이다. 남편이 배달 음식을 즐기는 날엔 "괜찮아, 오늘만 먹어" "한 입만 먹어"하며 유혹했고, 주말이나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냉장고의 부름이 끊이지 않는다. 그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자주 체중계에 올라 현실을 직시했고 하루 2L~3L의 따뜻한 물을 들이켜며 위장을 달랬다.
◇ 땀방울이 눈물이 될 때까지
대회 하루 전 본격적인 수분 빼기에 들어갔다. 땀복 속에 티셔츠와 후드티를 껴입고 섀도복싱, 샌드백 치기, 미트 트레이닝, 달리기를 쉼 없이 했다. 얼굴을 타고 줄줄 흐르는 땀방울이 마치 눈물처럼 느껴졌다. 강 관장 말대로 마침내 대회 하루 전 4.4kg 감량에 성공했다. 대회 당일엔 49.7kg으로 걱정 없이 계체를 통과할 수 있었다.
"내가 카넬로 알바레스,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 매니 파퀴아오, 박종팔이다" 스스로 주문을 걸며 링 위에 올랐다. 경기 시간은 1분30초씩 2라운드, 결론부터 말하자면 판정패했다. 첫 연타를 맞는 순간 당황했고 설상가상 콘텍트 렌즈가 돌아가서 한 쪽 눈이 안 보였다. 또 링 위에서 관장의 말을 전혀 듣지도 못 했고(정말 안 들렸다), 그동안 준비했던 기술마저 나오지 않았다. 상대는 기자보다 파워가 셌고 노련했다.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승패는 애초에 중요치 않았다(패배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5주간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후회 없이 달렸고 그만큼 정신적, 육체적 성장을 분명히 이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승부가 끝나고 웃음이 활짝 나왔다. 오랜만에 가슴 뛰는 경험이었다.
과거의 기자와 같이 로우텐션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당장 휴대폰을 내려놓고 '무엇이든 도전하라' 권하고 싶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