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는 일은 무척 어렵다. 특히 수필이나 에세이는 영상·사진과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세밀하게 묘사하더라도 부정확해 보일 수 있다. 수많은 여행기가 사진, 때로는 영상이 담긴 QR코드에 의존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화가로 활동 중인 수연 작가가 쓴 '흰 비둘기가 사는 곳'은 글씨로 만든 그림 같은 책이다.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아시시'에서 보낸 사흘간의 이야기를 붓질같은 글씨들로 그려냈다. 아시시의 풍경과 사람들, 감정의 묘사가 풍부하다. 알록달록한 색깔부터 무채색까지 다양한 색깔이 글씨에 묻어 있는 듯하다.
저자가 세밀한 묘사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자신의 내면이다. 단순히 아시시의 감상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린 시절과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한 고민, 자신의 감정에 대한 질문 등 마음 속의 이야기들을 담아냈다.
단조롭게만 느껴졌던 자신의 삶을 여행을 통해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다. 저자는 어린 시절을 부산 영도에서 보내며 숱한 바다와 섬들을 봐왔지만, 도시에 와서야 이 광경이 특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형형색색의 핑크와 민트색 페인트가 그려낸 영도의 오래된 벽은 그곳을 떠났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모습을 보여 줬다는 표현이 재미있다.
여행 안팎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도 읽을거리다. 수녀원에서 만난 모녀, 이탈리아의 수녀, 부지런한 교수 밑에서 고생하는 S씨 등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나와 아주 달랐던, 접점이 없는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게 만들어 주는 것이 여행의 매력이라는 저자의 가치관이 묻어난다.
돌이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들이 많다. "나와 아주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마주칠 수 있는 것이 여행이구나. 여행이란 다른 울타리에 있는 사람들과 스쳐가는 것."(91페이지) "부산에서 바다는 늘 볼 수 있는 것. 서울에 가고 나서야 그것이 특별하다는 걸 알게 됐다. 명절에 영도로 향할 때, 한 번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영도의 색'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왔다."(13페이지)
책을 읽으면 이탈리아 여행보다는 잊고 살았던 것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아시시는 천주교의 성인인 수도사 프란치스코, 서양 미술의 선구자 지오토가 있는 곳인 동시에 자신을 돌아보는 장소다. 어디든 자신의 잊은 것을 떠올리게 만드는 장소는 그만의 아시시가 되는 셈이다.
저자는 얇고, 반투명하며, 가벼운 것들에 대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그의 꿈은 '삶의 유한함과 아름다움, 순수한 즐거움을 담아내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약국에서 일하며 수시로 글을 쓴다.
◇흰 비둘기가 사는 곳: 아씨시에서 보낸 3일, 현현에피파니, 1만 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