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가장 뼈 아픈 날을 꼽으라면 1997년 11월22일일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그날 오전 10시 TV와 라디오로 생중계된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기 위해 단상 위에 섰다. 그는 비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경제는 지금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로 시작된 담화문은 국민 모두에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로 남아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시급한 외환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지원 체제를 활용하겠다"는 말과 함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김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을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IMF의 구제금융 신청이다. 1997년 초부터 불거진 대기업의 연쇄 부도로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당시로선 낯설었던 IMF로부터 구제금융까지 받아야 했다.
1990년대 중반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으로 축제 분위기였던 대한민국이었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과 함께 김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를 초래한 정권'으로 낙인 찍혔다.
집권 초기만 하더라도 김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은 과(過)보다 공(功)이 많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과 함께 '신경제' 개념을 들고 나왔다. 정권 출범과 함께 '신경제 100일 계획'도 발표했다. 기업활동의 자율성 제고와 중소기업 육성 등에 방점이 찍힌 정책이었다.
군사정권을 종식시키고 탄생한 문민정부는 경제분야에서도 자율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경제제도와 금융시장의 개혁에도 박차를 가했다. 뒤이어 '사건'이 발생한다. 정권 내에서도 극소수의 인사들만 관여해 탄생시킨 금융실명제가 그것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12일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표한다. 금융실명제의 탄생 순간이다. "이 시각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뤄진다"는 김 전 대통령의 발언과 함께 우리 금융시장 역사가 바뀌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세계화'에 무게를 실었다. 김 전 대통령은 1994년 호주 총리와의 정상회담을 위해 호주를 방문했다. 호주 방문길에서 김 전 대통령은 '시드니 구상'으로 불리는 이른바 '세계화 선언'을 공식화한다.
당시 우리 정부는 세계무역기구(WTO) 출범 등으로 국가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아야 했다. 국가 주도의 경제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도 한 몫 했다. 1996년 말에 이뤄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도 세계화라는 큰 명제에서 추진됐다.
당시 경제지표도 나쁘지 않았다. 김 전 대통령의 집권 첫 해인 1993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6.3%였다. 1994년, 1995년에는 경제성장률이 8.8%, 8.9%까지 치솟았다. 1995년에는 수출이 처음으로 1000억달러를 돌파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처음으로 1만달러를 넘어선 것도 김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이었다. 김 전 대통령 집권 직전이었던 1992년 7714달러에 머물던 1인당 국민소득은 김 전 대통령 집권 마지막해인 1997년 1만1505달러까지 늘었다.
하지만 무리하게 추진된 세계화는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 경제는 국제 경제 질서의 발빠른 변화에 따라가지 못했고, 결국 IMF 구제금융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YS 노믹스'도 IMF 구제금융으로 오명에 휩싸였다.
IMF 구제금융과 함께 비통한 표정으로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던 11월22일, 공교롭게 같은 날 김 전 대통령은 88세의 일기로 서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