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으로의 '피봇'(통화정책 전환) 가능성을 언급한 배경에는 중동 전쟁 장기화에 따른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우려가 자리한다. 반도체 슈퍼사이클 속 수출 호조로 경기 둔화 우려가 줄어든 만큼, 통화정책이 경고등이 들어온 물가 대응에만 전념할 상황이란 판단이다.
ADB(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 참석차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유상대 한은 부총재는 3일(현지시간) 동행기자단과 간담회에서 반도체 호황과 정부 부양책으로 인한 소비심리 개선 등을 언급하며 성장보단 물가 안정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금리 인하를 멈추고 인상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란 설명이다. 중동 전쟁 장기화로 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단 이유에서다.
실제 물가 상승 우려는 현실화하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3월 생산자물가지수는 전달보다 1.6% 오르며 2022년 4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4.1% 상승한 수준이다.
생산자 물가는 시차를 두고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최근과 같은 상승 흐름이 전반적으로 소비자 물가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국제유가 상승세가 심상찮다. 중동 전쟁 영향으로 지난 3월 기준 석탄·석유제품 생산자물가는 전월 대비 31.9% 올랐다. 외환위기였던 1997년 이후 최대치다.
정부가 최고가격제를 통해 가격 상단을 통제하고 있지만, 중동 전쟁이 길어질수록 물가 상승은 불가피하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고가격제가 지난 3월 소비자물가를 0.4~0.8%p(포인트) 낮췄다고 분석했다. 정부가 재정 부담 속 최고가격제 시행을 종료하면 유가는 급등할 가능성이 크고, 결과적으로 소비자 물가로 전이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반도체 호조로 경기 회복세가 완연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한은의 통화긴축에 따른 부담을 덜어주는 요인이다. 한은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올해 1분기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은 전기 대비 1.7%를 기록했다. 2020년 3분기 이후 5년 6개월 만에 가장 높은 성장률이다.
이에 따라 주요 국내외 기관들은 한국의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2% 후반대로 상향하는 상황이다.
전문가들 역시 반도체 경기가 호황을 보일 때 한은이 물가를 확실히 잡는데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향후 반도체 경기가 꺾이는 상황이 오면 한은의 통화정책에 제약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과 교수는 "국내외 기관에서 올해 한국의 성장률 전망치를 2% 후반으로 전망하는데, 이는 경기 과열 수준"이라며 "금리를 올려야 할 시기를 놓쳐 물가 상승으로 경기가 둔화되면 기존의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금리 인상에 신중해야 한단 분석도 나온다.
우석진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리 인상을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기고, 환율 안정을 위해 일본 등 국제적으로 금리 인상 기조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공급 문제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만큼 오히려 금리 인상으로 경제가 쪼그라들 수 있다. 반도체 이외 업종으로 경기 순환이 안 되는 상황에서 소득 재분배 등 재정정책의 역할도 병행해야 한다"고 제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