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국내 가축방역망은 전례 없는 시험대에 올랐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를 시작으로 아프리카돼지열병(ASF), 구제역(FMD)까지 주요 가축전염병이 잇따라 발생하면서 방역당국은 사실상 '3대 가축전염병 동시 대응' 체제에 돌입했다.
특히 ASF는 기존 발생 양상과 달리 전국 각지에서 단기간에 집중 발생했다. 해외 유행 유전형까지 확인되면서 새로운 감염 경로 가능성도 제기됐다. 검역당국은 수개월간 이어진 역학조사 끝에 감염원을 특정하고 추가 확산을 차단했다.
최정록 농림축산검역본부장은 지난 2일 경북 김천 검역본부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방역은 더 이상 경험과 직감에 의존할 수 없다"며 "과학적 근거로 위험을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달 취임 7개월을 맞은 그는 3대 가축전염병 동시 대응과 ASF 감염원 규명, 세계동물보건기구(WOAH) 육상동물 항생제내성(AMR) 협력센터 지정 등을 이끌며 과학 기반 방역체계 구축에 힘을 쏟았다.
최 본부장이 지난 동절기 방역의 대표 성과로 꼽은 것은 ASF 발생 원인 규명이다. 올해 ASF는 야생멧돼지 감염지역 중심으로 확산되던 과거와 달리 전국 각지에서 발생했다. 해외에서 유행하는 유전형까지 확인되면서 검역당국은 새로운 유입 경로 가능성을 열어두고 역학조사에 나섰다.
원인을 규명하기까지는 지난한 과정이 이어졌다. 사료 원료부터 기자재, 급수시설까지 돼지의 입을 통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추적에 나섰지만 좀처럼 실마리가 잡히지 않았다. 법적 의무가 없는 시료 확보를 위해 대학과 업체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협조를 구했고, 확보한 시료에 대해서도 반복적인 검사와 검증을 거쳤다.
최 본부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기술적으로 보면 마포 백사장에서 바늘 찾기 같은 작업이었다"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추적한 끝에 결국 혈장분말 원료에서 바이러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해야 재발 방지 대책도 세울 수 있다"며 "직원들이 밤잠을 줄여가며 가진 역량과 기술을 총동원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고병원성 AI 대응에서도 과학 기반 방역체계가 성과를 냈다. 검역본부는 빅데이터 기반 AI 위험도 예측 시스템을 고도화해 정확도를 기존 45%에서 60%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위험도 분석 결과를 토대로 고위험 농장과 지역에 소독 차량을 우선 배치하고 방역 자원을 집중 투입했다.
최 본부장은 "방역 자원은 한정돼 있다"며 "고위험 농장과 지역을 미리 예측해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체계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구제역과 관련해서는 최근 중국과 몽골에서 확산 중인 SAT1형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최 본부장은 "해외 가축전염병의 국내 유입 위험이 어느 때보다 높아 중국·몽골 노선에 대한 검역 검색과 탐지견 운영을 강화했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에서도 대한민국의 가축방역 역량을 다시 인정했다. 검역본부는 지난 달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93차 WOAH 정기총회에서 육상동물 항생제내성 협력센터로 신규 지정됐다.
최 본부장은 "2008년부터 구축해 온 동물 항생제 사용·내성 감시 체계와 원헬스(One Health) 연구 역량이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결과"라며 "한국 수의·방역 체계의 수준을 세계가 공인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검역본부는 앞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국가들을 대상으로 항생제내성 감시체계 구축과 기술훈련을 지원할 계획이다. 국가별 상황에 맞는 항생제 적정 사용 가이드라인 개발을 돕고 연구 협력도 확대한다.
그는 "협력센터 지정은 단순한 명예가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항생제내성 대응을 선도해야 한다는 책임이 커졌다는 의미"라며 "국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기술 자문과 교육 역할을 적극 수행하겠다"고 말했다.
ASF 백신 개발에도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ASF는 전 세계적으로 상용화된 백신이 없는 대표적인 가축전염병이다. 검역본부는 2030년 상용화를 목표로 국내 분리주 기반 생백신 후보주 개발을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 베트남 국가기관과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다.
국내 최초로 혈청학적 DIVA 기술이 적용된 백신 후보주도 확보했다. 올해 4월에는 수출용 ASF 백신 2개 품목에 대한 품목허가를 완료했고, 이달부터는 수출용 백신 생산을 위해 특수연구시설(BL3)을 민간에 개방한다.
검역본부의 역할은 방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식물검역 분야에서는 올해 사과 묘목 등 158억원 상당의 불법 식물류 1150톤을 적발했다. 농축산물 수출 확대를 위한 검역 협상도 성과로 꼽힌다. 검역본부는 중국 단감, 필리핀 포도, 뉴질랜드 절화류, 우즈베키스탄 감귤 등 4개국 5품목에 대한 신규 검역요건 협상을 타결했다.
최정록 검역본부장은 "검역본부는 연구개발과 진단, 위험평가, 검역·방역 기능을 모두 갖춘 국내 유일의 통합 전문기관"이라며 "현장의 문제가 연구실 분석을 거쳐 곧바로 정책과 방역 조치로 연결되는 것이 우리의 힘"이라고 강조했다. 또 "앞으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과학 기반 검역기관으로 발전해 나가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