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 수백조 원 단위의 천문학적 자본이 쏟아지면서 '제3차 반도체 치킨게임'이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고개를 든다.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는 이달 초 일본 히로시마 공장에 1.5조 엔(약 14조 원)을 투입해 차세대 D램, HBM4E 생산 기지 확장에 착수했다. 한국 역시 800조 원이 넘는 막대한 자금을 메가 클러스터에 투입하며 대대적인 인프라 확충을 공표했다.
여기에 대만 TSMC의 글로벌 확장과 일본 라피더스의 5조 엔 규모 최첨단 칩 양산 투자, 그리고 중국의 막대한 정부 지원 기반 증설까지 겹치며 글로벌 반도체 연쇄 증설이 본격화한다. 과거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피로 물들였던 '공급 과잉'의 전조와 유사한 흐름이란 지적에도 인공지능(AI) 시대 개막으로 시장의 룰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여러 전문가들은 이번 경쟁이 과거 2000년대 후반의 1, 2차 치킨게임과는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고 입을 모은다. 2007~2009년 독일 키몬다를 파산시킨 1차전과 2010~2012년 일본 엘피다를 무너뜨린 2차전은 범용 D램을 무기로 한 맹목적인 단가 인하 출혈 경쟁이었다.
반면 현재의 투자는 인공지능(AI) 시대의 산업 주도권을 쥐기 위한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와 맞춤형 메모리를 아우르는 '국가 주도의 공급망 블록화' 양상을 띠고 있다. 시장의 룰 자체가 근본적으로 재편된 것이다.
가장 큰 차이는 메모리 반도체의 수익 모델 변화, 즉 D램의 '파운드리화'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파운드리에 집중하기 때문에 메모리 치킨게임을 벌이지 않는다고 분석하지만 이들의 핵심 수익원은 여전히 메모리 사업이다.
진짜 핵심은 현재 폭발적인 수요를 견인하는 HBM(고대역폭메모리)의 사업 구조에 있다. 과거 치킨게임이 일단 생산된 범용 D램을 시장에 밀어내는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였다면 HBM은 엔비디아, AMD 등 빅테크 고객사와 물량, 가격을 미리 계약한 뒤 생산에 돌입하는 철저한 '수주형 맞춤 생산' 구조다. 이미 확실한 수요를 바탕으로 라인이 가동되므로 과거처럼 재고 누적을 털어내기 위한 치명적인 단가 덤핑 사태가 구조적으로 발생하기 어렵다.
더욱이 현재 기업들이 앞다퉈 증설에 나서고 있음에도 일반 범용 D램까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기현상은 반도체 공정상의 물리적 한계인 '웨이퍼 페널티'로 설명된다. HBM은 칩 크기 자체가 크고 제조 공정이 복잡해 일반 범용 D램(DDR5) 대비 약 2~3배의 웨이퍼 면적이 소모된다고 알려져 있다. 즉 수익성이 월등한 HBM 생산 라인 가동률을 10% 늘리면 물리적으로 일반 범용 D램 생산량은 20~30%가량 쪼그라들게 된다. 기업들이 의도적으로 감산하거나 담합하지 않아도 AI 수요에 맞춰 HBM 생산을 늘릴수록 범용 D램의 공급은 자연스럽게 억제되는 병목 현상이 발생한다. 이는 3강 과점 체제의 메모리 기업들에게 치킨게임 없이도 높은 단가와 영업이익을 보장하는 강력한 방어막으로 작용하고 있다.
경쟁의 주체가 개별 기업에서 '국가'로 격상되고 진입 장벽이 극단적으로 높아진 점도 전면적 치킨게임 발발을 막는 요인이다. 마이크론과 라피더스 뒤에는 일본 경제산업성의 막대한 보조금이 버티고 있다. 한국의 산업통상부 역시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에 송전선로 지중화 등 기반 시설 비용을 국비로 지원하며 총력전을 펴고 있다.
업계가 주시하는 뇌관인 중국의 반도체 굴기 역시 미국의 대중(對中) 제재로 최선단 공정의 필수품인 EUV(극자외선) 노광장비 반입이 막혀 기술적 진입이 원천 차단된 상태다. 레거시(구형) 범용 메모리 시장에서는 국지적인 출혈 경쟁을 유발할 수 있지만 수십조 원의 설비투자가 필요한 첨단 고부가가치 시장의 질서를 무너뜨릴 전면적 덤핑 공세를 펴기에는 물리적 한계가 뚜렷하다.
결국 현재의 흐름은 기업을 줄도산시키는 맹목적인 생존 게임이 아니다. 차세대 이종결합 패키징 기술과 수백조 원의 자본력, 그리고 정부의 든든한 인프라 지원이 완벽하게 맞물린 진영만이 살아남는 '초격차 융합 전쟁'이다. 관련 전문가는 "국내 업계는 당장 중국의 추격이 거센 레거시 제품 비중을 조절하고 수주형 고부가 제품 지배력을 높이는 한편, 정부와의 긴밀한 공조를 통해 전력망과 용수 등 필수 인프라를 적기에 확충해야 하는 중대한 과제를 안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