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추진하던 석유제품 최고가격제 출구전략이 국제유가 급반등으로 한 달 만에 원점으로 돌아갔다. 가격을 단계적으로 낮춰 제도를 종료하려던 계획은 사실상 제동이 걸렸고, 정부는 당분간 현행 최고가격을 유지하는 '동결' 기조에 무게를 두고 있다.
23일 정부와 정유업계에 따르면 이 같은 정책 변화의 배경에는 다시 치솟는 국제유가가 있다. 한국석유공사 오피넷에 따르면 22일 기준 국제 석유시장에서 브렌트유(선물가)는 배럴당 94.07달러를 기록했다. 서부텍사스산원유(WTI·선물가)는 86.83달러, 국내 수입 비중이 높은 두바이유(현물가)도 89.41달러까지 올랐다.
미국과 이란의 무력 충돌 재개와 예멘 후티 반군의 홍해 봉쇄 선언이 잇따르면서 수입 원유의 핵심 통로인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가 동시에 위협받은 영향이다. 종전 기대감으로 60~70달러대까지 떨어졌던 국제유가는 불과 20여 일 만에 최고 40% 안팎 급등했다.
정부 안에서도 당분간 최고가격제를 완화하기 어렵다는 분위기다. 양기욱 산업통상부 산업자원안보실장은 "(현재 상황은) 최고가격 해제를 검토할 조건에는 별로 맞지 않는다"며 "중동 상황과 국제유가 변동, 국내 물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최고가격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조는 이재명 대통령의 발언에서도 확인됐다. 이 대통령은 지난 21일 국무회의에서 "원래 계획에 의하면 지금쯤 (최고가격을) 더 내리거나 폐지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더 강화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정부는 대통령이 언급한 '강화'는 최고가격을 추가로 올리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고가격제를 당분간 유지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하고 있다.
정부는 국제유가 상승분이 시차를 두고 이달 말부터 다음 달 초 국내 주유소 판매가격에 반영될 경우 서민 체감 물가 부담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산업부가 24일 발표할 제8차 석유 최고가격은 인하 대신 동결하는 방안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현재 국내 석유 수급에는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판단한다. 다만 중동 긴장이 장기화할 가능성에 대비해 원유 수급 상황을 지속 점검하는 한편, 원유 스와프 등 비상 대응 방안도 함께 점검하고 있다.
산업부는 불과 4주 전인 지난달 27일 제7차 조정에서는 최고가격을 리터당 150원 인하하며 시장 연착륙을 위한 단계적 출구전략에 나섰다. 그러나 국제유가가 다시 급등하면서 추가 인하는 사실상 어려워졌고, 출구전략 역시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문제는 동결 기조가 장기화될 경우 정부의 재정 부담도 함께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유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판매가격을 묶어둘수록 정유사에 지급해야 하는 손실보전액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상반기 손실보전 정산액이 조 단위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유가가 오르는 상황에서 최고가격을 묶어두면 정유사에 지급해야 할 정부의 손실보전액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며 "물가 안정과 재정 부담 사이에서 정부의 선택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