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외롭고 쓸쓸한 내면과 마주하는 여정.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그린 연말 대작 ‘하얼빈’이 베일을 벗었다. 안중근을 다룬 기존의 수많은 작품들과 사뭇 다른 결의 영화다. 영웅의 위대함보다 안중근 개인의 고뇌에 초점을 맞췄다.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독립운동가들의 이야기를 다룬 블록버스터들과도 다른 온도다. 항일 정신의 뜨거움 대신에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건 투사들의 비장하고 서늘한 기운이 영화의 공기를 가득 채운다.
안중근 의사를 조명한 작품은 최근까지도 만날 수 있었다. 같은 제목 때문에 이 영화의 원작으로 오해받고 있지만 다른 작품인 김훈의 소설 ‘하얼빈’(2022)과 동명의 창작 뮤지컬을 원작으로 한 영화 ‘영웅’(2022)이 그러하다. 김훈의 소설은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시점을 교차하며 하얼빈 의거를 중심으로 마지막 5개월을 담은 이야기다. 영화 ‘영웅’은 단지동맹을 시작으로 안중근 의사의 생애 마지막 1년을 재구성한 뮤지컬 영화라는 특징을 지녔다.
영화 ‘하얼빈’은 1908년 7월 신아산 전투에서 시작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거사를 치르기까지 긴박했던 과정을 첩보 드라마 형식으로 전개한다. 안중근의 가족 이야기나 이토의 서사를 배제하고 의거를 준비하는 안중근과 독립군들의 갈등, 안중근을 추격하는 일본군 이야기에 집중한다. 첩보 영화에 나오는 배신자, 고문, 총격전, 심리전 등을 정교하게 배치해 메마르고 차가운 첩보 스릴러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얼빈’을 연출한 우민호 감독은 흥행작 ‘남산의 부장들’(2020)에 이어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한국 영화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성공한다. 안중근이라는 무게에 눌리지 않고 내면 묘사에 집중한 선택은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대신에 안중근을 담는 그릇을 키워 영웅의 존재감을 한층 드높인다. 한국 영화 최초로 아이맥스 포맷으로 특별 제작한 영화는 우민호 감독의 묵직하고 스타일리시한 연출과 세공된 미장센을 극대화해 뛰어난 영상미를 보여 준다. 이토의 첫 등장 신과 가장 중요한 하얼빈 의거 장면에서도 연출의 힘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얼빈’은 안중근의 내면을 비추는 영화일 뿐 아니라 지금껏 보지 못한 현빈의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영화다. 그동안 안중근 의사를 다룬 드라마와 영화가 실제 외모와 흡사한 분장에 신경 썼다면, ‘하얼빈’은 안중근의 새로운 모습을 제시한다. 영화 속 안중근의 얼굴은 실제 안중근의 얼굴도, 기존에 보던 현빈의 얼굴도 아니다. 오직 자유를 위해 싸운 평화주의자의 얼굴이다. 현빈은 안중근의 고독과 내면의 고통을 체화한 연기로 ‘잘생긴 안중근’이라는 가벼운 표현을 일축해 버린다. 현빈이 연기한 안중근도 특별하지만, 상처투성인 현빈의 얼굴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연기파 배우들의 호연도 돋보인다. 연기 전성기를 맞이한 박정민이 독립군 우덕순 역으로 극에 활기를 불어넣고, 독립군 김상현을 맡은 조우진은 이번 영화에서도 신 스틸러 역할을 거뜬히 해낸다. 전여빈은 유일한 여성 캐릭터이자 독립군을 돕는 공부인으로 등장해 절제된 연기를 선보이고, 유재명은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 역을 맡아 중심을 잡는다. 안중근과 갈등을 빚는 독립군 이창섭을 연기한 이동욱의 열연도 놓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일본 배우로서 쉽지 않은 캐릭터를 선택한 릴리 프랭키가 이토 히로부미 역으로 출연해 명연기와 명대사를 선사한다.
‘하얼빈’은 연출, 연기, 촬영, 음악, 사운드 등 기술적인 면에서 최정점을 찍는 영화다. 웰메이드 블록버스터라는 데에는 아마 이견이 없을 것이다. 다만 오락성을 강조한 독립운동 영화를 예상하거나, 안중근과 독립군의 이야기가 가슴 뜨거워지는 열기로만 채워졌기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변화를 시도한 독립운동 영화, 새로운 안중근을 보여 주는 영화, 여백과 여운의 영화라는 점에서 ‘하얼빈’을 주목해 보길 바란다.
올 연말을 개봉 시기로 잡은 것도 영화에는 득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12·3 계엄 사태 이전에 이 영화를 보았다면 영화의 대사들이 이 정도로 깊이 와 닿지 않았을 거다. 극 중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 백성들을 언급하며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선 지금의 현실이 겹친다. 영화에도 운명이 있다면 ‘하얼빈’은 지금 우리에게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의무를 각인시키기 위해 때맞춰 도착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