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전쟁', "크"소리 나오는 소주 한 잔에 담은 삶의 온도

한수진 ize 기자
2025.05.30 11:12
'소주전쟁' 스틸 컷 / 사진=쇼박스

대한민국 성인 한 명이 1년에 마시는 소주는 평균 53병(2021년 통계청 기준). 전국적으로는 연간 약 23억 병이 출고된다. 누군가는 퇴근 후 한 잔에서 위안을 찾고, 누군가는 기쁨과 슬픔을 같은 술잔에 담아 나눈다. 그만큼 소주는 오랫동안 한국인의 삶에 녹아온 감정의 매개이자 사회적 풍경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 소주는 늘 배경이었을 뿐 중심에 놓인 적은 드물었다. 이 지점에서 영화 ‘소주전쟁’은 과감한 선택을 한다. 단순한 주류의 이야기를 넘어서 그 술을 둘러싼 자본과 인간, 그리고 시대의 갈등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한 잔의 술에 담긴 삶의 무게를 묻는다.

영화는 IMF 외환위기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배경으로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소주 브랜드 국보소주는 문어발식 경영으로 인해 자금난에 빠지고, 그 틈을 노린 글로벌 투자사 솔퀸의 직원 인범(이제훈)이 매각을 성사시키기 위해 회사를 찾아온다. 국보소주의 재무이사 종록(유해진)은 회사를 지키기 위해 인범을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인범은 냉철한 목적을 숨긴 채 종록의 진심에 접근한다.

이야기의 골격은 익숙하다. 위기에 빠진 회사를 두고 대립하는 두 남자. 목적과 감정이 어긋난 관계. 예측 가능한 서사의 틀이다. 하지만 ‘소주전쟁’은 이 틀을 재현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이 단순한 서사를 빌려 ‘삶'이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 중심에 종록을 연기한 유해진이 있다.

'소주전쟁' 스틸 컷 / 사진=쇼박스

종록에게 국보소주는 단지 직장이 아닌 인생의 마지막 경계선이다. 가정까지 등한시하며 회사를 지키려는 집착은 곧 삶을 지키려는 절박함으로 번지고, 유해진은 이 감정을 과장 없이 그러나 밋밋하지 않게, 절묘하게 조율해 낸다. 그가 소주를 들이켜는 장면들엔 연기가 아닌 사람의 체온이 있고, 그 체온이야말로 이 영화가 끝까지 붙잡고자 하는 정서다.

인범은 그와 정반대의 인물이다. 글로벌 투자사에서 파견된 성과 중심의 전문가. 처음엔 종록의 정서도, 소주 한 잔의 의미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회사를 물질적으로만 바라보고 종록은 그에게 자신이 쌓아온 모든 것을 설명하려 애쓴다.

다만 이제훈의 인범 캐릭터는 전작 드라마 ‘협상의 기술’에서의 M&A 전문가 역할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 기시감을 남긴다. 똑똑하고 깔끔하며,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방식으로 협상을 주도하는 인물상은 익숙하다. 그럼에도 ‘소주전쟁’의 인범은 그 틀에서 살짝 벗어난다. 그가 감정과 관계에 서서히 물들어가는 과정, 그리고 이를 표현하는 내면의 흔들림은 이전보다 한층 더 유연하다.

'소주전쟁' 스틸 컷 / 사진=쇼박스

브로맨스라는 말보다 먼저 이들은 시대적 단절을 끌어안은 서로 다른 세대다. 그 거리감이 좁혀질 때 관객은 단지 인간관계를 넘은 시대 간 대화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소주전쟁’은 소주를 단지 이야기의 상징으로만 소비하지 않는다. 병의 디자인, 색감, 촬영, 조명 하나하나에 이 술을 살아 있는 오브제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배어 있다. 미술감독은 ‘탑 소주’라는 브랜드를 실제 주류 기업과 협업해 개발했고, 촬영과 조명은 소주병의 반사광까지 감정의 흐름에 맞춰 설계했다. 극 중 소주가 인물보다 더 튀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존재감을 갖는 건 이 덕분이다.

이처럼 감정과 물성을 동시에 정제해낸 영화는 많지 않다. 그것은 시대극이지만 다큐멘터리처럼 무겁지 않고, 인간극이지만 감정에 함몰되지 않는다. 시대의 온도와 인간의 체온 사이 이 영화는 절묘한 균형을 잡아낸다.

‘소주전쟁’이 특별한 이유는 이야기의 끝에서 묵직한 술맛을 남긴다는 데 있다. 후반부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반전을 쥔다. 그 순간 관객은 등장인물의 궤적을 다시 되돌아보게 되고, 술로 쌓아 올린 신뢰와 배신, 회한과 희망을 다시 음미하게 된다.

'소주전쟁' 스틸 컷 / 사진=쇼박스

이 마지막 반전이 탁월한 건 반전 그 자체보다 그것을 맞이하는 유해진의 연기다. 담담하지만 단단한 시선, 눌러왔던 감정의 폭발. 유해진은 이 장면에서 감정의 복잡성을 오롯이 감내하며 ‘소주전쟁’을 단순한 드라마가 아닌 ‘감정의 잔’으로 마무리 짓는다. 술 한 잔을 만들기까지의 그 모든 감정 곡선이 이 영화의 진짜 술맛을 만든다.

감독 이름 없이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전까지 크레디트를 둘러싼 긴 싸움을 겪어야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주전쟁’은 그런 과정을 거친 작품답게 지켜야 할 것을 지키려 했던 인물들의 서사와 어딘가 닮아 있다. 소주 한 병을 붙들고 회사를 살리려 애쓰는 이들의 진심은 영화 바깥에서 한 편의 영화를 끝까지 지켜낸 사람들의 태도와 겹쳐진다. 한국 상업영화 역사상 유례없는 ‘감독 없는 영화’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남는 것은 유해진의 얼굴이고, 이제훈의 변화다. 그리고 관객의 마음엔 한 잔의 여운이 조용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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