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6일 만에 2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여름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좀비딸'에는 직접 출연하지 않고도 강한 존재감을 남기는 인물이 있다. 바로 가수 보아다. 그의 히트곡 'No.1(넘버원)'(2002)이 영화에 삽입돼 극의 주인공 정환(조정석)과 수아(최유리) 부녀의 정서를 표현하는 특별한 역할을 한다.
'No.1'은 보아가 열일곱에 발표한 곡으로 그해 SBS '가요대전'에서 최연소 대상 수상이라는 성과를 안겨준 노래다. 경쾌한 멜로디 위에 "You're still my No.1"(넌 여전히 나의 첫 번째)이라는 후렴구가 반복되는 이 노래는 지금까지도 보아의 이름을 상징하는 단어로 남아 있다.
'좀비딸'의 필감성 감독은 이 곡을 영화에 삽입한 이유에 대해 "발랄한 분위기와 슬픈 멜로디, 'You're still my No.1' 같은 가사가 영화와 잘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극 중 사용된 'No.1'은 아버지가 좀비가 된 딸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장면에 삽입돼 대사 없이도 두 인물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단순한 삽입곡을 넘어 작품의 서사를 감정적으로 연결하는 핵심 장치로 작동하는 것이다.
발매된 지 20년이 넘은 곡이 지금 다시 스크린을 통해 울림을 만든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보아의 시간을 증명한다. 'No.1'을 불렀던 열일곱 소녀는 어느덧 데뷔 25주년을 맞았고, 여전히 무대 위에서 현재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 연결은 지난 4일 발매한 정규 11집 'Crazier(크레이지어)'로 이어지며 보아의 존재감을 더 크게 각인한다. 앨범 제목부터 자신을 잃지 않겠다는 보아의 태도를 반영한다. 그는 총 11곡이 수록된 이번 앨범에서 3곡의 작사·작곡에 참여했고, 동명의 타이틀곡 'Crazier' 역시 직접 가사와 멜로디를 썼다. 타이틀곡은 중독성 있는 기타 리프와 팝 펑크 사운드 위에 "I’m crazier"라는 후렴구를 얹어 거친 세상 앞에서 물러서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펼쳐낸다.
눈여겨볼 건 정규 10집 'BETTER(배터)'(2020)의 타이틀곡 작사·작곡에는 그의 이름이 없었다는 점이다. 퍼포머로서의 역량이 중심에 놓였던 전작과 달리 'Crazier'는 송라이터로서의 보아, 그리고 현재의 위치에서 스스로를 정의하는 보아가 중심에 있다. 타인의 손에 의해 쓰인 곡이 아닌 자신의 언어로 써내려간 타이틀곡은 그래서 단순하지가 않다.
때문에 'Crazier'의 "It's a crazy world / I've seen it all / But guess what? I'm crazier"(세상은 엉망이고 / 나는 그 모든 걸 겪어봤어 / 그런데 어때? 나는 그보다 강해) 후렴은 지금의 보아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선언처럼 들린다. 25년간의 수많은 무대와 평가, 그리고 기대 속에서 살아남은 그는 이제 "판을 바꿔볼까", "판을 키워볼까"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타자를 향해 "You're still my No.1"이라 외치던 소녀는 이제 그 누구의 시선도 필요치 않은 확고한 자기 확신으로 가요계 중심에 서 있다.
골괴사 진단으로 인해 이번 활동에서 무대에 오를 수는 없지만 보아는 'Crazier' 뮤직비디오를 통해 여전히 무대를 압도하는 법을 증명한다. 우렁찬 보컬과 당당한 워크, 그리고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시선은 카메라를 무대로 바꿔놓는다. 정면을 응시한 채 거침없이 노래하는 보아는 작은 동작 하나, 표정 하나만으로도 25년간 축적해 온 무대 위 감각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현실적인 제약을 딛고도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를 완성한 이번 뮤직비디오는 지금의 보아가 여전히 동시대 최전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2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음악은 수많은 변주를 거쳤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태도만큼은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던 보아. 열세 살에 무대를 박차고 나온 소녀가 마흔을 앞둔 지금까지 여전히 넘버원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이제 "You're still my No.1"이라는 가사는 누군가를 향하기보다 보아 자신에게 향하는 쪽에 가장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