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시간이 더해질수록 빛을 발한다.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아쉬움, 그때는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아름답게 남는 기억은 언제나 뒤늦게 그 가치를 드러낸다. 지난 6일 첫 방송을 시작한 드라마 ‘백번의 추억’은 바로 그 ‘뒤늦게 빛나는 순간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1980년 서울, 매일 수많은 사람들의 희노애락을 실어 나르던 100번 버스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익숙한 장소, 그래서 평범하기만 한 100번 버스에서 안내양과 승객들이 엮어내는 우정과 사랑, 좌절과 희망을 펼친다.
JTBC 토일드라마 ‘백번의 추억’(극본 양희승 김보람, 연출 김상호)은 1980년대 100번 버스 안내양 고영례와 서종희의 빛나는 우정과 이들의 운명적 남자 한재필을 둘러싼 애틋한 첫사랑을 그리는 뉴트로 청춘 멜로 드라마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인물은 고영례(김다미)다. 그 시절 여자의 몸으로 네 명의 자식을 키우는 엄마(이정은)의 어깨에 얹힌 삶의 무게를 덜어주기 위해, 어쩌면 장녀라는 이유 하나로, 결국 가족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청춘을 내어준 인물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그저 평범한 캐릭터로 남겠지만, 고영례는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돈을 벌어 집을 위하는 바쁜 삶의 틈 사이를 알차게도 채운다. 낮에는 버스 안내양으로 돈을 벌고, 밤에는 야간학교에서 공부하며 국어 교사의 꿈을 키운다. 꿈과 사랑과 우정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의 친구 서종희(신예은)는 흥 많고 자유분방하다. 난폭한 오빠와 함께 살던 서종희는 생존을 위해 오기와 독립심을 키운 인물이다. 현실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찾겠다는 결심으로 도망치듯 정착한 청아운수에서 인생의 절친 고영례를 만난다. 현실에 발붙인 꿈을 꾸는 고영례와는 달리 미스코리아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이 두 여성이 우정을 나누며 성장해가는 과정은 단순히 ‘여자들의 연대’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80년대라는 시대가 허락하지 않았던 청춘의 선택들을 대변하며 서로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고영례와 서종희 사이에 남자 한재필(허남준)이 등장한다. 고영례의 집과는 대비를 이루는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그는 무려 백화점 사장의 아들, 금수저다. 하지만 어머니의 죽음과 폭력적인 아버지의 재혼으로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냈고, 그 기억을 지우지 못한 채 상처로 안고 있는 인물이다. 그때의 기억 때문인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복싱을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 안내양 고영례와 서종희를 만나 그동안 느껴본 적 없는 새로운 감정에 휘말린다. 고영례와 서종희 사이에서 첫사랑의 설렘과 현실의 벽을 상징하는 존재다. 세 인물이 얽히며 펼쳐내는 감정들은 우정과 사랑이 교차하는 청춘 서사의 깊이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를 이루는 공간, 주인공들의 직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징이다. 100번 버스는 단순히 버스라는 교통수단을 넘어 1980년대 서울의 일상이 압축된 작은 무대다. 그 안에는 학생과 직장인, 장사꾼, 연인, 그리고 안내양이 있다. 이제는 사라진 직업이지만 버스 승객의 안전을 위한, 버스의 안정적인 운행을 위한 업무를 수행했던 그들의 목소리와 손짓은 당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선명하다. ‘백번의 추억’은 이 직업을 지닌 이들을 주인공 삼아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노동의 역사와 함께 청춘의 초상을 그린다. 100번 버스를 운행하는 청아운수 사무실과 안내양들이 함께 사는 기숙사, 버스 종점 등의 배경 역시 청춘들의 꿈과 갈등이 담겨있는 뚜껑 열린 타임캡슐의 역할을 한다.
뉴트로 감성은 이 드라마의 또 다른 무기다. 안내양 유니폼과 교복, 청바지, 옛 버스 자체의 생김새와 색감, 다방, 거리 풍경까지 세심하게 복원된 80년대의 모습은 시청자를 자연스럽게 그 시절로 이끈다. 여기에 귀를 사로잡는 음악은 더욱 자연스럽게 시절의 향수를 더한다. 백예린이 리메이크한 ‘Close To You’는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울림으로 장면들에 녹아들어 아날로그적 서정성을 배가한다. 그 시절을 지나온 중장년층에게는 그때의 나를 되살리는 향수가, 젊은 세대에게는 낯설지만 신선한 매력을 동시에 전달한다.
다만 이 드라마는 단순히 복고 감성만을 품은 드라마가 아니다. ‘백번의 추억’이 지금의 시청자를 사로잡는 이유는 80년대 청춘들이 겪었던 고민과 오늘날 청춘들이 놓인 현실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가족 부양이라는 무게와 가족 간에 넘을 수 없는 마음의 벽, 꿈을 좇고 싶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맛보는 좌절, 사회적 시선에 맞서고 싶은 열망, 이 모든 무게를 나눠 진 고영례와 서종희의 모습은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결국 시대만 다를 뿐, 청춘의 본질적 고민은 반복된다는 사실을 드라마는 보여준다.
‘백번의 추억’은 우정과 사랑 속에서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를 통해 청춘이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세심하게 보여준다. 고영래와 서종희의 모습은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꿈에 대한 간절한 열망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서로에게 가장 큰 위안이자, 때로는 치열한 경쟁자가 되는 이들의 관계성도 청춘이 겪는 복잡한 감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단순한 로맨스나 청춘 드라마가 아닌 우정과 사랑을 통해 어떻게 청춘은 어른으로 성장하는가를 보여준다.
조이음(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