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윤 하면 쾌활함과 사랑스러움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배우다. 출세작 'SKY 캐슬'의 독기 가득했던 예서를 제외하곤, '어쩌다 발견한 하루'부터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선재 업고 튀어'와 '오늘도 인간입니다만'에 이르기까지 밝고 쾌활함을 내세웠던 '로맨틱 코미디'는 그의 독보적인 영역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웃음기를 완벽하게 지운 창백하고 건조한 얼굴로 스크린에 섰다. 데뷔 14년 차, 서른의 문턱에서 4년 만의 영화 복귀작으로 서스펜스 공포물 '살목지'를 선택하면서다. 늘 밝은 빛의 영역에 머물던 그가 빛 한 점 들지 않는 서늘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평소 '공포 마니아'를 자처해 온 그의 숨겨진 취향과 맞물려 기분 좋은 배신감을 안긴다.
자타공인 '공포 마니아'라는 김혜윤은 지난 2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진행된 '살목지' 인터뷰 내내 신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서운 콘텐츠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본다는 그는 "마침내 좋아하는 장르에 직접 뛰어들 수 있게 되어 설레는 마음이 컸다"며 눈을 반짝였다.
"원래 공포 영화를 좋아해요. 긴장감을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해소되는 것에 매력을 느끼죠. '살목지'는 물귀신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가 주는 신선함이 있었고,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는 내가 믿는 게 현실이 아닐 수 있겠다는 공포감이 매력적이었어요."
오는 8일 개봉을 앞둔 영화 '살목지'는 로드뷰 화면에 포착된 기괴한 형체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저수지로 떠난 촬영팀이 검은 물밑에 숨겨진 끔찍한 공포와 마주하는 서스펜스물이다. 단편 영화로 실력을 입증해 온 이상민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하다. 극 중 김혜윤은 미스터리한 현장 속에서도 촬영팀을 이끄는 강단 있는 PD 한수인 역을 맡아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는다.
이 작품에서 우리가 알던 발랄하고 통통 튀는 김혜윤은 철저히 배제됐다. 팍팍한 현실에 지쳐있으면서도, 기이한 공포 앞에서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수인의 얼굴은 김혜윤의 새로운 발견이다.
"다른 공포물 주인공들처럼 마냥 비명을 지르기보다 두려움 속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책임감 강한 모습이 매력적이었어요. 속으로는 기겁하면서도 겉으로는 상황을 통제하고 방향을 제시해야만 하는 인물이죠. 제가 가진 특유의 밝은 에너지를 덜어내고 절제된 눈빛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법을 치열하게 고민했어요."
보는 것과 직접 연기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성덕(성공한 덕후)'을 자처하며 즐겁게 임한 현장이었지만, 난생처음 도전하는 호러 연기에서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마주했다.
"공포 연기는 철저한 타이밍 싸움이더라요. 어디서 무언가가 튀어나올지 뻔히 알면서도, 스크린 속에서는 난생처음 발견한 것처럼 생생하게 놀라야 해요. 그 세밀한 계산과 리액션의 타이밍을 맞추는 과정이 신선한 공부가 됐어요."
완성된 영화를 극장에서 확인한 김혜윤의 만족도는 최상이다. 이미 대본을 숙지하고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극장에서 마주한 '살목지'는 짜릿한 공포를 선사했다. 그는 "제가 없는 장면에서 특히 많이 놀랐다. 360도 파노라마 카메라나 모션 디텍터 같은 장비들이 만들어내는 기괴한 앵글, 그리고 심장을 조이는 음향 효과가 더해지니 영화관의 몰입감이 엄청났다"며 감탄을 쏟아냈다.
공포 영화 현장 특유의 '귀신 목격담'을 묻는 질문에는 뜻밖의 아쉬움을 토로해 웃음을 안겼다. 보통 귀신이 출몰하면 작품이 대박 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 한 스태프가 현장에서 정체불명의 아이(귀신)를 본 일화는 있었지만, 정작 김혜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저도 무용담처럼 썰을 풀고 싶어서 산속이나 저수지 너머를 뚫어지게 응시하며 무언가를 찾아 헤맸어요. 이번 현장은 조명도 어둡고 으스스해서 내심 기대했는데, 제 앞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아 너무 아쉬웠죠(웃음)."
'살목지'의 공포 지수를 매겨달라는 요청에는 "10점 만점에 9.5점"을 외쳤다. 그는 "0.5점을 뺀 이유는 공포물에 취약하신 분들도 용기 내어 극장을 찾아주셨으면 하는 작은 배려"라며 센스 있는 당부를 덧붙였다.
그가 이 영화를 통해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흥행뿐 아니라 '극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집단적 연대감'이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모여 공포 영화를 보며 비명을 지르고 서로 놀리던 추억이 다들 있잖아요. 어두운 상영관 안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타이밍에 놀라고 감정을 공유하는 짜릿함은 극장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고 생각해요. 부디 많은 분들이 오셔서 '살목지'가 주는 그 짜릿한 시너지를 함께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느덧 데뷔 14년 차, 20대를 쉼 없이 달려온 그는 서른의 문턱에 섰다. "베개 자국이 늦게 사라진다"며 유쾌하게 신체적 변화를 농담 삼으면서도 연기를 향한 열망은 여전히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다.
"작품에서 저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보일지 항상 기대감을 갖고 있어요. 이 역할을 내가 연기하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다보니 여러 장르를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해요. 매 작품을 거칠 때마다 조금씩 더 깊어지고 단단해지기를 바라요. 10년 뒤의 제가 지금을 돌아봤을 때 '참 부지런히 성장했구나'라고 느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배우고 부딪히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