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K팝 산업은 막대한 자본력과 인프라를 갖춘 대형 기획사들의 과점 체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압도적인 물량 공세 없이 중소 기획사의 아이돌이 대중의 시야에 드는 것은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것만큼이나 힘든 상황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조용히 잊힐 뻔했던 중소 기획사 출신 5인조 걸그룹 리센느(RESCENE)가 아주 오랜만에 '중소돌의 기적'을 썼다. 이들이 판을 뒤집은 힘은 화려한 물량 공세가 아니라 날것의 유쾌함과 탄탄한 음악성이다.
중소 기획사 더뮤즈엔터테인먼트 소속 리센느(원이, 리브, 미나미, 메이, 제나)는 2024년 3월 데뷔 때부터 콘셉트와 음악성은 뚜렷했다. 팀명부터 '장면(Scene)'과 '향(Scent)'의 의미를 담아 향기를 통해 특정한 장면을 각인시키겠다는 독자적 정체성을 세웠다. 여기에 버클리음대 출신 프로듀서인 대표의 음악적 감각을 더해 완성도 높은 사운드로 팀색을 다졌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좋은 음악 덕분에 팬덤은 조금씩 쌓였지만, 대중적 인지도의 문턱을 넘기에는 인프라의 한계가 분명했다. 그렇게 '숨은 웰메이드 그룹'으로만 남을 뻔했던 이들은 올해 상반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요동치기 시작했다.
도약의 방아쇠를 당긴 것은 리더 원이의 개인 유튜브 채널이다. 타 유튜브 웹예능에서 특유의 예능감을 입증했던 원이를 위해 외부 제작사가 직접 기획한 이 채널은 무대 위 신비로운 아이돌의 허울을 과감히 벗어던졌다.
결정적 한 방은 일본인 멤버 미나미와의 에피소드에서 터졌다. 과한 갸루 분장을 한 채 엉뚱한 매력을 발산하는 미나미에게 원이가 "거제도에서 이러면 혼난다"며 핀잔을 주자, 미나미가 해맑게 "거제 야호!"라고 받아친 장면이 알고리즘의 간택을 받은 것이다.
맥락 없는 이 인사말은 숏폼 플랫폼을 강타하며 올해 최고 유행어로 등극했다. 조회수는 수백만 뷰를 훌쩍 넘겼고, 채널 개설 3개월 만에 구독자는 40만 명을 돌파했다. 제나와의 차진 사투리 티키타카, 거제도 브이로그 등 후속 영상들 연이어 대박을 터뜨렸다. 엔믹스 해원이 '외모 체크' 밈으로 대중적 체급을 키웠듯 리센느 역시 유튜브 예능이라는 현대의 킹메이커를 완벽하게 활용해 낸 셈이다.
유튜브에서 촉발된 화제성은 곧바로 본업인 음악 성적으로 직결됐다. 과거 웹예능에서 코미디언들에게 '하트 어택이냐'며 인지도 굴욕을 당했던 이들의 2024년 발매곡 'LOVE ATTACK(러브 어택)'이 멜론 차트를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3월 31일 멜론 TOP100 실시간 차트 문을 간신히 두드렸던 이 곡은 대중의 입소문을 타며 무서운 기세로 순위를 끌어올렸고, 6월 10일 자정 5위를 찍는 기염을 토했다. 밈을 계기로 리센느를 처음 접한 대중이 자연스럽게 음악까지 찾아 들었고, 완성도 높은 곡에 대한 호감이 지속적인 청취로 이어졌다. 과거의 행적까지 재조명되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실력을 갈고닦은 언더독'이라는 든든한 서사까지 획득했다.
파급력은 더 뻗어나갔다. '거제 야호'의 발상지인 경남 거제시는 멤버 전원을 홍보대사로 위촉했고, 리센느는 딱딱한 위촉식 대신 트렌디한 숏폼 영상으로 화답하며 또 한 번 화제를 모았다. 나아가 아이돌 인기의 척도로 불리는 JTBC 간판 예능 '아는 형님' 출격까지 확정하며 완벽한 대세 굳히기에 들어갔다.
물론 밈에 기댄 단발성 화제에 머물지 않으려면 결국 본업으로 다시 증명해야 한다. 리센느에게 지금은 유쾌한 입소문을 음악적 신뢰로 굳혀야 하는 중요한 시기다. 이들은 오는 7월 데뷔 후 첫 리메이크 싱글 발매를 앞두고 또 한 번의 도약을 준비 중이다. '거제 야호'라는 강력한 돌풍을 타고 날아오른 리센느가 음악을 통해 오래 남는 향기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