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4일 올라온 유튜브 채널 ‘뜬뜬’의 콘텐츠 ‘핑계고’ 100회 특집. 우리나라 토크 콘텐츠의 과거와 오늘은 바로 이 방송을 경계로 나뉘어야 한다고 본다. 이날 방송에서는 ‘100분 토크는 핑계고’라는 제목으로 프로그램의 100회를 맞아 배우 김남길, 윤경호, 주지훈이 출연했다.
원래부터 MC 유재석은 토크에 강했다. 과거 지석진이나 김용만, 김수용 등과 함께 한 ‘조동아리’가 유명했다. ‘아침 조(朝)’자를 써서 ‘아침까지 떠드는 동아리’를 일컬을 정도로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해 아예 유튜브 콘텐츠도 토크로 만들었다. 김남길과 주지훈, 윤경호는 이에 딱 맞는 걸출한 조합이었다.
주지훈은 중후한 이미지와 맞지 않게 꽤 말이 많은 게스트였고, 김남길은 자신의 콘서트를 할 때 4~5시시간은 기본으로 진행해 ‘감금회’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윤경호 역시 ‘투머치토커’로는 빠지지 않는다. 그는 최근 출연한 드라마 ‘김부장’의 공약으로 ‘13시간 묵언수행’을 걸었다가 실제 공약 기준치인 13% 시청률을 넘겨 이를 실천했다가 결국 실패한 역사도 있다.
이들은 3월 무려 154분에 이르는 토크 콘텐츠를 선보였고,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이후 차를 타고 이동하며 산책을 할 때도 쉴새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이 당시 김남길이 “라면 먹으러 다니는 유튜브를 해보고 싶다”고 윤경호에게 제안했던 프로그램이 성사돼 지난 11일 ‘뜬뜬’의 여름방학 특집 프로젝트 ‘2026 썸머로드 시리즈-라면 먹고 올래?’로 거듭났다.
이 프로그램 역시 티저 영상만으로 화제를 모았는데, 공개 하루 만에 무려 조회수 250만회를 기록했다. 공개 3일에는 450만회를 넘겨 ‘숏폼’이 득세하는 토크 콘텐츠 시장에서 단숨에 화제작으로 올라섰다. ‘핑계고’ 100회 특집의 1650만회 조회수에 이어 ‘수다쟁이’ 남자들의 콘텐츠가 대중에 먹혀들어 간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수다쟁이’가 유행이다. 연예계에서 이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수다를 좋아하는 아저씨 연예인들을 담은 프로그램’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존재감은 중후하고, 때로는 악역에 가까운 이미지가 수다라는 형식을 통해 소탈하고 유하게 풀어 나며 반전의 캐릭터가 주는 놀라움을 배가했다. 이들의 존재는 이제 하나의 ‘본캐(본캐릭터)’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됐고, 과거 말이 많은 일이 터부시되는 연예계의 관습에도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윤경호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그는 특유의 우락부락한 인상과 함께 ‘도깨비’ ‘비밀의 숲’ ‘이태원 클라쓰’ 등의 작품에서 보인 이미지로 다소 무서운 캐릭터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지난해 공개된 넷플릭스 ‘중증외상센터’의 한유림 역을 통해 큰 변곡점을 맞이한다. 그는 주인공 백강혁(주지훈)을 방해하려 하지만 자신의 딸을 구해낸 백강혁의 편이 돼, 귀여운 매력을 발산하는 ‘유림핑’이 됐다.
이번 ‘13시간 묵언수행’ 공약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는 소속사 선배 소지섭의 성공을 위해 냅다 ‘묵언수행’을 질렀지만, 13%의 시청률이 그렇게 단기간에 달성될지 그리고 윤경호가 13시간의 묵언수행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야심 찬 도전 끝에 7시간 만에 ‘컬투쇼’ 라디오에 나왔고, 가장 극적인 형태로 방송에서의 수다로 묵언수행을 깨면서 최고 농도의 웃음을 선사했다.
김남길 역시 마찬가지다. ‘선덕여왕’의 고독한 영웅 비담을 시작으로 ‘나쁜남자’ ‘열혈사제’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을 거치면서 김남길이 입었던 이미지는 ‘고독한 남자’의 그것이었다. 수다는 그것과 완전 반대 캐릭터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김남길에는 태생부터 수다 본능이 있었다. 국내 팬미팅을 5시간 하면서 ‘감금’의 원성을 샀던 그는 일본 원정 팬미팅에서는 9시간 동안 공연을 펼쳐 ‘감금의 세계화’에 앞장섰다.
이외에도 ‘쓰저씨(쓰레기 아저씨)’의 별명을 가진 김석훈, ‘살인의 추억’ 시절부터 ‘아줌마 수다’의 권위자로 알려졌던 김상경, ‘삼시세끼’ 등의 예능에서 요리실력 못지않게 수다로서의 능력을 선보인 ‘차줌마’ 차승원 등도 중년의 중후한 이미지와 함께 수다쟁이로서의 본캐릭터를 가지고 반전의 매력을 보여준다.
이들은 공교롭게도 연예계 수다의 권위자 유재석으로부터 원석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고 육성됐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들의 능력을 모두 모아 콘텐츠로 만들어내고, 하나의 밈(Meme)처럼 승화한 부분도 유재석의 콘텐츠 창작자로서의 눈썰미와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실 연예계에는 과거부터 ‘남자주인공을 하려면 과묵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데뷔 때부터 누구든 제작자 또는 기획사의 사장으로부터 언질을 받은 이미지가 있었으며, 이 같은 이미지가 고독하거나 과묵할 경우에는 이러한 캐릭터를 연달아 연기하기 위해 실제 생활에서도 ‘절제’를 요구받을 때가 있었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배우의 경우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지나치고 자신이 희화화되는 것은 원하지 않는다. 실제 배우 장혁의 경우에도 자신의 분노 연기가 후배인 개그맨 곽범으로부터 지나치게 희화화하자 사석에서 “내 흉내를 내지 말아줬으면 좋겠다”는 부탁으로 이어질 정도였다. 그런 장혁 역시도 쇼핑몰 브랜드 광고를 통해 계속 망가지고 있다는 것은 안 비밀이다.
아무튼 이런 수다쟁이 남자배우들의 등장과 인기는 대중이 더는 배역으로서의 과묵하고 건조한 이미지와 살가운 본래 이미지를 그다지 착각하지 않는, 성숙하고도 차원이 높은 콘텐츠 소화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과거 같으면 악역을 하면 무조건 시장통에서 등짝을 맞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요즘 시청자들은 ‘캐릭터 때문이지’하면서 점잖게 넘어가는 일이 많다.
이러한 시선이 바로 이런 수다쟁이 남자배우들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앞서 거론한 윤경호나 김남길, 주지훈이나 차승원, 김상경, 김석훈 등은 평소의 이미지 때문에 딱히 코믹 일변도의 캐스팅 제안을 받지도 않는다. 평소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연기생활 나름의 기조를 지키는 것은 본캐와 부캐, 그리고 그 본캐와 부캐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대중의 이해도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앵글 안에서는 작품에 맞춰 과묵하지만, 평소에는 즐겁게 나불거릴 수 있도록 제약이 줄어든 지금의 방송 환경. 어쩌면 연예인이 되는 일은 예전보다 더욱 행복한 일인지 모른다.
신윤재(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