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세상에 ‘가능한 사랑’이란? 보름달이 시린 까닭 [시네마 리포트]

윤지훈(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9.28 14:38

'거장' 이창동 감독이 묻는 냉혹한 자본주의 구조 속서 가능한 사랑

이창동 감독은 신작 가능한 사랑을 통해 냉혹한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한지 질문을 던졌다. 이 영화는 정리해고된 노동자 부부와 이들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부부 사이의 간극과 고통을 다루며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제작 과정에서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은 이 감독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지원 신청을 취하하고 넷플릭스로 방향을 틀어 작품을 완성했다.
'가능한 사랑' 이창동 감독(중앙)과 전도연(오른쪽) 김지용 촬영감독(아래)

#. 2009년 6월, 쌍용자동차는 976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했다. 5년 전 회사를 매각했지만 이를 사들인 자본은 핵심 기술과 인력만 남긴 채 적자를 누적했다. 그 배경에 자본의 치밀한 의도가 있었다는 강한 의심이 쌓여갔다.

결국 회사 측은 전체의 36%에 해당하는 2646명의 직원 감축안을 내놨다. 뒤이어 976명의 노동자를 정리해고했다. 노동자들은 ‘목숨을 내건’ 옥쇄파업에 돌입했다. 하지만 공권력은 그해 최루액 사용량의 95.5%(2042L)에 해당하는 최루액을 뿌려대며 진압했다.

이후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절반가량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으며, 해고 노동자 가운데 83%(88명)가 우울 및 불안장애를 겪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잇따랐다. 기어이 33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 2025년 6월, 영화진흥위원회는 ‘중예산 한국영화 제작지원 심사 결과’를 발표했다. 순제작비 규모 20억원부터 80억원 미만 작품을 심사한 뒤 선정작을 공개했다.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일부 중견 감독들의 신작들이 포함됐다.

영화계 일각에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짐짓 명성과 전작들로 거둔 성과만으로도 투자배급사의 제작비 투자를 유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영화계 내부의 믿음(?)을 밀어내고 중견 감독들까지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야 하느냐는 볼멘소리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당시 한국 영화산업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붕괴의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었던 상황. 일부 중견 감독들의 신작이 영화진흥위원회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영화산업이 맞닥뜨린 위기의 정도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선정작 가운데 이창동 감독의 신작 ‘가능한 사랑’도 자리했다. 이 역시 영화계 내부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바라보았다. 79억여원의 순제작비 규모를 내세운 이 감독은 15억원을 지원해 달라며 제작지원 심사를 신청했다. 지원작에 선정되면 지원 약정 체결 이후 3개월 안에 투자배급사로부터 나머지 제작비를 유치해야 한다는 조건이 따라붙었다.

이창동 감독. 사진제공=넷플릭스

1980~90년대 한국문학을 이끈 대표적 소설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힌 이창동 감독은 1993년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의 각본을 쓰고 조연출로 제작에 참여하며 충무로에 발을 내디뎠다. 이후 급격한 산업화의 뒤안길의 씁쓸한 삶(초록물고기·1997년), 굴곡진 현대사가 개인에게 안긴 비극(박하사탕·2000년), 보편적인 사랑의 의미에 관한 진중한 질문(오아시스·2002년), 사회적 부조리와 폭력적 현실을 감당해낼 수 없어 결국 깊은 상처로만 남겨진 여린 삶(시·2010년) 등을 통해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관객의 호평을 받았다. 특히 2007년에는 삶의 절망 앞에 놓인 연약한 인간에게 대체 구원이란 존재하는 것이냐고 물은 ‘밀양’으로 전도연에게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오아시스’와 ‘시’ 등으로도 베니스와 칸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 감독은 ‘가능한 사랑’으로 올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또 다시 트로피(심사위원대상)를 거머쥐었다. 베니스의 트로피는 이 감독이 세상에 던진 새로운 질문에 응답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사모펀드에 회사를 매각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대거 정리해고하려는 자본에 맞서 옥쇄파업에 나섰지만 경찰의 무지비한 폭력에 진압당한 채 해고당한 노동자의 고통과 이를 온전히 이해하려 애쓰며 힘겨운 일상을 버텨내는 아내, 두 사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다큐멘터리 감독과 돈 많은 그의 자본가 남편. 다큐멘터리 감독이 “자본으로부터 독립”하는 영화를 찍어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이들 사이 간극은 그 깊이만큼 날카로운 벼랑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들은 그 아래로 끝없이 추락해갈 것처럼 위태롭게 서 있다.

위태로움은 결국 파열음을 낳고야 만다. 그러고서야 이들은 자신들 사이에 놓인 간극의 깊이를 마치 태생 처음처럼 깨닫고 마는데, 그때 세상은 얼마나 차갑고 건조한가.

사진제공=넷플릭스 

그럼에도 이창동 감독은 세상을 향한 자신의 시선을 쉽사리 포기하지도, 강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해고 노동자 부부가 아직 연애 시절 말없이 오랜 시간 바라봤고, 또 이들이 겪어가는 지금 이 신산한 현실의 밤하늘에서도 여전히 사그라지지 훤한 보름달이 그 상징 아닐까.

그 보름달의 깊은 속내를 드러내 보일 때까지 이창동 감독은 치열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했다고 고백했다. “타인의 삶을 그리는 창작자인 내가 그들(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을 소비하거나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사용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평생 해온 질문”에 쉽게 답할 수 없다는 고통스러움을 드러냈다.

또 그 답을 찾아 나서려 했지만 그는 자본이라는 높디높은 장벽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다는 절망에 부딪히기도 했다. 투자배급사들은 ‘가능한 사랑’에 자본을 투입하지 않았다. 투자배급사들로서는 일정한 수익을 내기에 버거운 작품에 자본을 들일 수 없다는 기업의 기본적 입장을 버릴 수 없었을지 모른다. 2018년 관객의 호응을 크게 얻지 못한 이 감독의 ‘버닝’이 남긴 상업적 아쉬움도 그런 결정의 한 배경이 됐을지 모른다.

그러는 사이 ‘가능한 사랑’은 영화진흥위원회의 중예산 영화 제작지원작으로 선정됐다. 하지만, 직후 이 감독은 지원 신청 자체를 취하했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 넷플릭스로 방향을 틀었다.

이 감독은 “자본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서는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영화 창작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토로했다. 그리고 그는 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다만,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할수록 멀어지게 하는 냉혹한 자본의 세상 구조 속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은 대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를 묻는 치열함만은 끝내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던진 물음은 관객의 가슴에 뼈아프게 달려들어 밤하늘에서 둥실거리는 보름달을 시리지만 오래도록 바라보게 한다.

윤지훈(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돈이 보이는 리얼타임 뉴스’ 머니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