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선규의 악역은 매번 다른 방식으로 불편하다. '애마'에서는 입을 열 때마다 진저리 치게 하더니, '100일의 거짓말'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어도 숨을 조인다. 저열한 탐욕을 쏟아내던 속물에서 타인의 생사를 담담히 결정하는 권력자까지. 진선규는 표정의 크기와 말의 속도, 상대를 대하는 낯빛을 바꾸며 악역 안에서도 전혀 다른 사람을 만들어낸다.
tvN 토일드라마 '100일의 거짓말'에서 그가 연기하는 사토 신이치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다. 조선인의 희생을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고 가족의 미래까지 자신의 필요에 따라 결정한다. 진선규는 이 인물을 힘이 세다는 사실을 과시할 필요조차 없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느긋한 몸가짐과 정돈된 말투에는 상대가 결국 복종하리라는 확신이 깔려 있다.
첫 등장부터 그렇다. 경성역에서 농담을 건네고 유소란(김현주)의 음식 솜씨를 칭찬하지만, 요리 가짓수를 물으며 손짓을 살피는 눈은 웃음에 휩쓸리지 않는다. 말은 상대를 편하게 하는데 시선은 허점을 찾는다. 진선규는 미소를 거두고 험악해지는 전환 없이도 평범한 식탁을 심문의 자리로 바꾼다.
아들 태웅(박진영)을 모욕하던 후쿠다(김중희) 앞에서도 사토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진선규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과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압박을 쌓는다. 후쿠다가 스스로 말을 거두고 무릎을 꿇기까지 지켜보는 차분함이 호통보다 위협적이다. 자신의 힘을 증명하려 크게 움직일 필요조차 없는 사람의 여유가 사토의 권력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총독에게 출신을 멸시당할 때는 얼굴이 굳고 주먹이 꽉 쥐어진다.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았던 사토에게 지위는 열등감을 지우는 수단이기도 하다. 진선규는 그 굴욕을 과장으로 토해내지 않고 억누른 채 몸의 긴장에 새긴다.
이런 내면을 드러내면서도 사토를 가엾게 만들지는 않는다. 학살 피해자 금석중(감우성) 앞에서 진선규가 보여준 건 자신의 잘못을 의심해 본 적 없는 사람의 평온함이다. 만행을 임무 수행으로 정당화할 때도 변명하는 사람의 조급함이나 머뭇거림이 없다. 상대의 죽음을 예고하는 순간조차 이미 정해진 절차를 통보하듯 건조하게 처리한다. 진선규는 잔혹함을 과시하기보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태도로 사토의 비인간성을 드러낸다. 절박하게 책임을 묻는 피해자와 끝내 가책을 느끼지 않는 가해자,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이 장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
가장 세밀한 압박은 아들 앞이다. 태웅의 손끝 상처를 확인하고도 곧바로 추궁하지 않는 장면이 그렇다. 손을 훑는 시선에는 의심을 남기고 얼굴과 말투는 결혼 이야기를 이어갈 만큼 태연하게 유지한다. 무엇을 얼마나 알아챘는지 읽을 수 없어 긴장하게 된다. "내가 후회하지 않듯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말에는 아버지의 인정과 복종을 요구하는 압박이 겹친다.
그리고 그 다정함은 폭언으로 뒤집힌다. 학살의 진실을 묻는 태웅에게 어린 날의 생존을 죄로 돌리고 출신까지 모욕한다. 몰아붙인 뒤 다시 차갑게 고마움을 요구하는 변화가 특히 섬뜩하다. 진선규는 분노를 터뜨리는 데서 끝내지 않고 감정을 거둔 뒤에도 상대를 지배하려는 태도를 이어간다. 앞서 쌓아온 침착함이 있기에 폭발의 위력도 커진다.
이 연기는 낯선 언어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진선규는 두 달간 일본에 머물며 하루 7시간씩 대본을 익혔고, 일본인이 쓰는 조선어까지 연습했다. 대사를 외워내는 긴장보다 상대를 살피는 여유가 먼저 보인다는 점에서 준비의 성과가 드러난다. 외국어 대사에서도 회유와 명령, 멸시의 차이가 살아 있다.
'극한직업'에서는 허술함으로 웃음을 만들고 '자백의 대가'에서는 부드럽고 단호한 변호사로 신뢰를 줬던 배우다. 사토는 그 믿음직한 얼굴마저 의심하게 한다. 선역과 악역을 오가는 폭도 넓지만 악역 안에서 다시 다른 사람을 만드는 세밀함이 더 인상적이다. 진선규를 믿고 보는 이유는 익숙한 연기를 잘해서가 아니다. 익숙한 얼굴로도 매번 다른 감정을 겪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