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피싱 피해 예방을 위해선 금융·통신·정부의 공조가 핵심이다. 보이스피싱이 통신망을 통한 기망부터 계좌 자금 편취, 범죄자 추적까지 얽힌 범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가 지난해 금융, 통신, 수사기관간 정보 공유 플랫폼도 구축했다. 하지만 피해가 발생하면 배상책임은 금융사만 진다. 정부가 추진 중인 보이스피싱 무과실 책임제 도입이 이뤄지면 벌어질 상황이다.
15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당국은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한 금융사의 무과실 배상 책임을 규정한 통신사기피해환급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추진 중이다. 개정안은 금융사가 과실이 없더라도 보이스피싱 피해에 대해 최대 5000만원까지 배상하는 내용이다. 정무위는 국정감사 이후 법안 논의를 시작할 전망이다.
무과실 배상 책임제는 기존에 보이스피싱을 근절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 방향과 다르게 금융사에만 책임을 집중한다는 점에서 논란이다. 그간 정부는 금융·통신·수사기관의 공동 대응을 강조해왔다. 범죄가 통신망을 통해 시작돼 금융계좌에서 피해가 발생하고, 자금세탁과 도주까지 이어져 한 기관만의 힘으로 막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금융위가 지난해 10월 구축한 보이스피싱 정보공유·분석 인공지능(AI) 플랫폼 'ASAP'이 대표적이다. ASAP는 금융사와 통신사, 수사기관 등이 각자 확보한 보이스피싱 정보를 공유하고 AI를 활용해 범죄를 예방하는 플랫폼이다. 금융사, 통신사, 수사기관은 다른 기관이 제공한 정보와 ASAP의 분석정보를 받아 각각 계좌 지급정지, 전화번호 차단, 수사 등에 활용한다.
ASAP은 출범 후 지난 7월말까지 46만3000건의 의심정보를 공유하며 663억6000만원 규모의 보이스피싱을 사전 차단하는 성과를 거뒀다. 아울러 금융위는 지난 8월부터는 보이스피싱 의심정보를 ASAP를 통해 더 적극적으로 공유하도록 통신사기피해환급법도 개정하며 금융·통신·수사기관의 공조를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정부가 보이스피싱 공조를 강조한 것과 달리, 금융사만 부담하는 무과실 배상 책임제가 도입되면 통신사와 수사기관의 도덕적 해이를 키울 수 있단 우려가 나온다. 이미 금융사는 2024년부터 보이스피싱 자율배상 체계를 운영하며 보이스피싱에 대한 예방 노력이 미흡한 경우에 대해 배상 조치를 하고 있으나, 통신사는 보이스피싱과 관련해 피해자에게 배상한 경우가 없다.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이 손해배상책임을 규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보이스피싱을 차단하기 위한 통신사의 각종 의무는 규정하고 있다. 해당 법 제32조의4는 통신사가 부정가입방지시스템 등을 이용해 가입자 본인 여부를 확인하도록 규정해 대포폰을 막도록 규정한다. 또 같은 법 제84조의2는 통신사가 거짓으로 표시된 전화번호의 발신 차단·정정, 통신서비스 중지 등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경찰청에 따르면 2024년 적발된 대포폰은 9만7399개로 2020년 8923개보다 10배 이상 늘었다. 보이스피싱 범죄의 주요 수단인 통신에 대한 규제 확대 필요성이 제기되는 이유다.
정부와 수사기관의 역할도 법으로 규정돼 있다. 통신사기피해환급법 제2조의2는 금융위원회가 보이스피싱 관련 정보를 수집·전파하고 예보·경보를 발령하는 등 피해 예방과 최소화를 위한 대응조치를 하도록 규정한다. 경찰청에 설치된 전기통신금융사기 통합신고대응센터는 같은 법 제2조의7에 따라 신고·제보 접수뿐 아니라 사기이용계좌 지급정지 요청, 범죄 이용 전화번호의 통신서비스 중지 요청, 관련 정보 분석·전파 등의 업무를 맡는다.
금융권 관계자는 "ASAP를 통해 책임과 역할은 나눠놨는데, 무과실 배상 책임제로 인해 부담은 금융사만 지게 됐다"라며 "금융위의 소관법인 통신사기피해환급법으로 땜질을 하는 게 아니라, 특별법을 통해 통신사와 정부까지 포함한 근본적인 방안을 내놓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