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권의 기업금융 경쟁이 '좋은 기업을 뺏어오는 싸움'에서 '유망한 기업을 먼저 찾아내는 싸움'으로 옮겨가고 있다. 정부의 생산적 금융 초기에 대기업과 초우량기업 위주로 공급되던 자금이 설비투자와 발주를 거쳐 중소·중견 협력사로 확산할 가능성이 커지면서다. 은행들은 바이오·반도체 등 첨단산업 전문가를 심사조직에 직접 배치하고 산업분류와 신용평가모형, 영업점 핵심성과지표(KPI)까지 뜯어고치며 '기업 발굴전'에 대비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은행권 기업대출은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늘었다. 은행권은 하반기부터 이 자금이 설비투자와 신규 발주를 타고 협력업체로 흘러갈 가능성에 주목한다. 협력업체의 매출과 수주가 늘면 운전자금과 시설자금 수요도 뒤따르기 때문이다.
특히 직접 자금조달이 어려운 중소·중견기업은 은행 대출 의존도가 높은 만큼, 대기업 투자 확대를 계기로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기업들이 새로운 여신시장으로 등장할 수 있다.
문제는 이들 기업의 미래 성장성을 어떻게 판별하느냐다. 이미 높은 신용등급과 충분한 담보를 갖춘 기업이라면 은행 간 금리 경쟁으로 고객을 확보할 수 있지만, 성장 초기 단계 기업은 얘기가 다르다. 현재 재무제표나 담보력이 부족해도 앞으로 수주와 현금흐름이 좋아질 기업을 먼저 찾아내야 한다. 은행들이 기업여신 심사조직에 '은행원 아닌 전문가'를 끌어들이는 이유다.
KB국민은행은 지난 3월 특허법인과 대기업 연구개발(R&D) 경력을 보유한 석사 출신 변리사를 첨단전략산업 심사 전문인력으로 채용한 데 이어 추가 채용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7월엔 증권사 출신 이차전지·에너지·화학 분야 전문가를 영입했고, 인프라 투자 분야에서도 17년 경력의 전문가를 충원했다. 기존에도 기업상품부에 변리사 9명과 박사 3명을 포함해 20명의 기술평가 전문위원을 두고 있다.
심사 기준도 바뀌고 있다. 국민은행은 생산적 금융 대상 약 1000개 업종을 별도로 분류하고 이를 다시 성장성 등에 따라 4개 영역으로 세분화했다. 신용등급이나 담보력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생산적 금융 대상 업종은 대출 문턱을 낮추고, 새 산업분류를 KPI와 여신심사, 금리 결정 등에 적용한다.
신한은행도 산업 전문가를 여신심사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현재 초혁신경제지원팀에는 삼성전자·현대중공업 등에서 근무한 변리사가, 산업분석 조직에는 삼성전자·SK온 경력의 변리사가 배치돼 있다. 기업여신심사부에서는 변리사 3명과 약사 1명, K컬처 애널리스트 1명 등 산업분석 전문가 5명을 채용해 반도체·바이오·의약품 등의 여신심사를 지원한다.
하나은행 역시 기업여신심사부에 산업전문 심사역을 채용 중이다. 변리사와 회계사 등 전문자격을 갖추거나 무형자산의 가치 분석·평가가 가능한 인력이 대상으로, 이르면 다음달 1~2명이 입행할 예정이다. 기업여신심사부에는 첨단전략산업 전담 심사팀도 운영하고 있다.
우수한 기업을 먼저 찾아낸 영업점에는 인센티브를 준다. 하나은행은 생산적 금융 대상 가운데 242개 '코어 첨단산업' 업종을 별도로 분류해 영업점에 타깃 법인 리스트를 제공하고 있다. 해당 기업에 신규 여신을 공급하면 영업점 평가 때 실적을 실제 취급액의 1.2배로 인정한다. AI·바이오 등 국가전략산업을 대상으로 한 전용 특판대출도 신설했다. 은행원이 기존 거래기업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성장기업을 직접 발굴하도록 유인을 만든 것이다.
우리은행은 외부 전문가 영입보다 기존 인력의 전문성을 끌어올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생산적금융기업영업본부와 기업영업전략부 내 생산적금융지원팀이 기업 발굴과 영업전략을 담당하고, 중기업심사부에는 별도의 생산적금융 전담 심사반을 두고 첨단산업·혁신기업의 사업성과 성장 가능성을 평가하고 있다. IB그룹의 생산적금융투자부에서는 대출뿐 아니라 지분투자와 펀드, 프로젝트금융 등도 검토한다.
우리은행은 지난 4월 생산적 금융 대상 업종을 기존 343개에서 471개로 확대했다. 올해 상반기부터 생산적 금융 취급 실적에 가중치와 별도 가점을 주고, 관련 법인을 담당하는 기업지점장 평가기준도 신설했다.
NH농협은행은 아예 여신심사부 내에 '전략산업심사국'을 신설했다. 미래전략산업과 지역특화산업별 전담 심사역을 운영해 업종 전문성을 높이고, 영업점에는 산업분석 자료를 제공한다. 전국 심사역 200명을 대상으로 경제·산업 전망과 부실 사례 교육도 진행했다.
평가의 무게중심도 과거 실적에서 미래 성장성으로 옮기고 있다. 농협은행은 올해 인수금융 신용평가모형을 자체 개발해 기업의 미래 현금창출능력과 사업 성장성을 중심으로 분석하도록 했다. 첨단전략산업 지원 대상도 기존 124개 업종에서 전·후방 산업을 포함한 269개 업종으로 두 배 이상 확대했다. 생산적 금융 업종에 여신을 취급하면 KPI상 실적 가중치를 주고, 특별우대금리 0.2%포인트와 영업점 여신 전결권 120% 확대도 적용한다.
이 같은 변화의 핵심은 기업을 평가하는 '눈'이다. 바이오·반도체처럼 대규모 선투자가 필요하거나 신규 발주를 계기로 급성장할 수 있는 기업은 현재 재무제표와 담보가치만으로 미래를 판단하기 어렵다. 기술과 산업 전망, 수주 가능성, 미래 현금흐름까지 읽어내 남들보다 먼저 자금을 공급하는 능력이 새로운 기업금융 경쟁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