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돈 500원으로 영국은행 움직인 소떼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심재현 기자
2021.01.01 05:00

[기업(氣-UP)하기 좋은 나라]1-①

[편집자주] 포스트 코로나 시대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 국가로 발돋움 하기 위해서는 국부의 근간인 기업의 기운(氣)을 끌어올려(UP)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기업의 발목을 잡는 불필요한 규제를 줄이고 기업가 정신을 함양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머니투데이는 한국의 기업가들과 기업가 정신의 뿌리 찾기에 나섰다.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사진제공=아산사회복지재단

"나를 성공 모델로 보는 것은 좋다. 그러나 나만 봐선 곤란하다. 더 많은 실패 사례도 주목해야 한다. 내가 걸어온 길에도 줄곧 축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배가 더 많았다. 나는 그 쓴 잔을 실패라 여기지 않고 시련으로 받아들이며 앞만 보고 걸었을 뿐이다. 새천년에도 나와 같은 기업인이 또 나올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야 한국 경제가 우뚝 선다."

머니투데이는 2000년 1월1일과 10일 두차례에 걸쳐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칼럼('세상의 변화가 여전히 멋있다', '모두 승자가 될 수는 없다')을 실었다. 그의 마지막 유고가 된 두 편의 기고에는 여든다섯 노(老) 기업인의 여전히 펄떡이는 열정이 살아 숨쉰다.

그는 당시 기고에서 스스로를 "복받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기회가 온다고 해서 누구나 성공의 자취를 남기진 않는다. 코로나19 사태와 저성장의 돌파구로 창의력과 도전정신이 회고되는 2021년. 머니투데이가 신축년 새해 첫날을 '정주영'이라는 이름 석자로 여는 이유다.

기업인의 '흙수저 열정', 우리 시대 교본 삼아야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1915~2001)이 1971년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권 지폐 1장으로 4300만달러(당시 약 500억원)의 영국 은행 투자를 유치하며 한국 조선산업의 기틀을 다진 지 꼭 50년이 됐다. "이봐, 해봤어?"로 집약되는 그의 도전정신은 2021년 현대차가 선도하는 수소전기차로 이어진다. 현대차가 제조한 수소전기트럭 '엑시언트' 첫 수출물량 10대가 지난해 7월6일 전남 광양항에서 스위스로 출발했다. /사진제공=현대차

올해 3월이면 정 명예회장이 별세한 지 20년이 된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그의 바람대로 기업인의 열정이 무한히 들끓고 이런 열정이 새로운 세상을 향한 뜨거운 심장이 되는 시대를 맞이했을까. 긍정하기 쉽지 않다. 지난 세밑 국회가 밀어붙인 기업 관련 법안을 제쳐두더라도 지난해는 유독 기업인이 힘들었던 한 해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마지막으로 흙수저 기업인 신화를 목격한 게 언제였던가.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흙수저 신화의 추억은 너무도 먼 과거다. 신화를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으로 대해야 하는 사회에선 미래가 싹틀 수 없다. 청년의 상상력이 박동하는 사회, 이를 시대와 시장의 열망으로 체화하는 사회여야 한발 더 나갈 수 있다.

늦진 않았다.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최종건, 박태준. 한국 기업의 첫걸음을 뗐던 기업인들은 성공과 실패의 양면에서 충분한 교본이 될 사례다.

미국은 기업인의 성공과 실패, 교과서로 배워

1970·80년대 한국 기업의 성공사가 오롯이 이들 기업인의 공은 아니다. 화려한 성공 일대기 이면의 그늘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의 당부대로 도전의 길목에서는 실패와 과오에서도 배워야 한다. 실패는 배움으로 연결될 때 비로소 성공을 향한 시련으로 거듭난다.

미국에서는 기업인의 공과를 교과서로 가르친다.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와 석유재벌 존 록펠러는 물론,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와 빌 게이츠 전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까지 그들의 기업가 정신을 산업 발전과 강대국 진입의 초석으로 기술하면서 독점을 포함한 사회·경제적 문제도 잉태했다고 지적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가 2016년 국정교과서 논란을 거치면서 1세대 기업인의 이름을 도려낸 것과 차이가 크다.

기업가 정신을 다루지 않는 국내 교육의 한계를 지적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갈등이 두려워 논쟁을 피하고 생략을 추종하는 사회에서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를 욕망하는 것은 사치다.

'정주영의 거북선' 이대로 외면해서야

사진 위쪽: 우정사업본부가 2015년 8월 '현대 한국인물 시리즈' 3번째 우표로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과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을 소재로 한 우표를 발행했다.아래사진 왼쪽: 고 최종건 SK그룹 회장.아래사진 오른쪽: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이 국내 최초로 국산화한 전화기로 시험통화를 하고 있다.

한때 교과서에 '소떼 방북'의 주인공으로 소개됐던 정주영의 '거북선 담판'은 한국 경제사에서 손꼽히는 극적인 장면 중 하나다. 정 명예회장은 1971년 기술도, 자본도 없이 조선소를 짓겠다는 일념 하나로 영국을 찾아가 500원짜리 지폐(현재 물가 감안 약 5만원)의 거북선 그림을 꺼내 보이며 투자자들을 설득했다.

"한국엔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든 역사와 두뇌가 있소. 쇄국정책 때문에 산업화가 늦어졌지만 한번 시작하면 몇백년간 잠자던 잠재력이 터져 나올 것이오."

생동하는 기업가 정신의 일화를 손에 쥐고도 외면하는 것은 애처로운 일이다. 전태일의 근로기준법만큼 정주영의 거북선도 빠트릴 수 없는 우리의 역사다. 우리 사회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서려면 노와 사 모두 담고 가야 할 가치다.

이춘우 사단법인 기업가정신학회장(서울시립대 경영대 교수)은 "기업가 정신에 대한 교육이 양이나 질 측면에서 절대 부족하다"며 "10대와 20대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1966년 8월16일부터 1975년 5월10일까지 발행한 500원권 지폐(위쪽·크기 165㎜×73㎜)와 1973년 9월1일부터 1993년 5월12일까지 발행한 500원권 지폐(아래쪽·159㎜×69㎜). /출처=화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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