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정책이 나온 뒤 대출길까지 막혔어요. 반드시 재개될 것이란 믿음으로 가족·친지·지인 등에 돈을 융통해 사업장을 유지해왔는데 폐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정권이 바뀌면서 원전 정책도 바뀌겠지만, 더는 버틸 재간이 없어요"
경남 창원에서 원전 기자재를 납품해온 A사 정아무개 대표는 머니투데이와 만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정 대표는 엔지니어로 근무하다가 인천에서 회사를 창업하고, 창원으로 자리를 옮기며 사세를 키워왔다. 지난 40여 년 동안 원전관련 사업체를 운영해 온 정 대표는 최근 법원에 기업회생을 신청하고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사실상 '은퇴'가 아닌 '강퇴'다. A사의 사세가 기울기 시작한 것은 2017년 6월이다.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에 참석한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탈핵시대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신규 원전 중단과 건설계획 백지화 공약을 내세웠다.
고리1호기 영구정지 선포식 직후부터 원전 관련 일감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20명 넘게 근무했던 공장에 남은 인원은 정 대표를 제외하면 단 1명에 불과하다. 300톤 규모의 대형 기자재가 끊임없이 생산됐던 설비에는 10톤 상당의 기자재가 간간이 제작될 뿐이다.
A사도, 정 대표의 삶도 180도 바뀌었다. A사는 10년 넘게 두산중공업(현·두산에너빌리티) 동반성장 협력사로 이름을 올렸을 정도로 우수한 기술력을 보유했지만, 탈원전 정책 후 금융권 대출이 거절되는 부실기업으로 전락했다.
정부·정치권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탈원전 정책이 폐지될 것이라 예견했던 정 대표는 적자의 회사를 유지하기 위해 빚을 낼 수밖에 없었다. 은행권 대출이 막히자 친·인척과 지인들에게까지 손을 벌려야 했다. 사업장을 비우고 돈을 융통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집도 자가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월세로 옮겨갔지만 가세는 기울어만 갔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하고 탈원전 정책을 전면 재수정하겠다고 밝혔지만, 중단됐던 신한울 3·4호기 공사가 재개돼도 기자재 납품은 2025년에나 가능했다. 결국 법원에 회생신청을 내게 됐다.
A사 뿐만이 아니다. 원전 기자재 업계가 겪는 공통된 문제다. 이들 기자재 업체에 각종 부자재를 납품하는 업체들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전방산업인 원전 기자재 회사들의 일감이 줄어들면서, 원전 생태계의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부자재 회사들도 위태로운 상황이다.
마산봉암공단은 창원 전 지역에 주요 부자재를 납품하는 소규모 사업장이 몰려있는 곳이다. 가전·조선 등 부자재도 생산·납품하고 있지만, 핵심 매출원은 원전 기자재 업체들이다. 윤 대통령은 후보시절이던 지난 1월 이곳 공단을 찾아 탈원전 폐기를 약속하기도 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지역의 풀뿌리 공단이 지역 경제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윤 대통령이 취임하고 실제 탈원전 폐기를 골자로 한 정책 계획을 공개했지만, 이곳 공단 역시 처지는 그대로다. 원전 기자재 회사들의 일감이 전무한 탓에 이곳의 일감도 늘어나지 않고 있다. 지난 5년간 이곳 공단에서는 규모가 작은 사업장을 중심으로 폐업이 속출했다. 폐업한 사업장에 기계 1대만을 가지고 홀로 운영하는 1인 사업장들이 들어서면서 더욱 영세화됐다.
한청수 마산봉암공단 기업협의회 회장은 "매출의 40~50%를 차지하는 원전기업 일감이 떨어지면서 회사마다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한 회장이 운영하는 사업장의 경우 10%의 인력을 감축했으나, 이 정도는 공단 내에서 가장 사정이 나은 편에 속한다.
마산봉암공단 입주기업인 청운사는 효성중공업에 전력설비 표식기기를 납품하고 있다. 효성중공업은 두산에너빌리티에 변압·차단기 등 전력설비를 공급한다. 탈원전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효성중공업의 일감이 줄어들었고 청운사 역시 매출이 30% 넘게 줄어드는 등 타격을 입었다.
박승엽 청운사 이사는 "매출이 줄어들면서 고정비 부담이 확대됐지만, 직원들 생계만큼은 지켜주기 위해 인원 감축은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덕분에 탈원전에 따른 일감부족으로 회사의 이익이 줄어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박 이사는 이달 초 치러진 지방선거에 출마해 창원특례시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됐다. 지난 5년 동안 본인이 몸담은 회사뿐만 아니라 주변 기업들이 도산하거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서 작은 영역에서라도 정책에 참여하고, 관련 종사자들과 청년 기업인을 대변하고자 하는 마음이 커져 출마하게 됐다고 소개했다.
박 이사는 "문재인 정부의 그릇된 정책적 판단으로 창원 지역 경제가 순식간에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을 보면서 제조업에 종사하는 청년으로서 해야할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지난 1월 윤 대통령이 마산봉암공단을 찾았을 당시에도 풀뿌리 제조기업에 청년이 모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달라고 요청했던 것도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