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부총리(겸 기획재정부 장관)는 중요한 자리지만 기업이 보기엔 감이 상당히 멀다. 세금제도나 예산같은 가장 영향력 있는 결정을 하지만 여파가 기업에 미치기까지 산업통상자원부나 고용노동부 등 다른 부처를 '몇 다리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업들이 추경호 경제부총리를 말하기 시작했다. 흔한 일이 아니다.
추경호를 말하는 기업들이 빼놓지 않고 하는 표현이 바로 '악역'이다. 출발은 공직자지만 지금은 국회의원 배지를 단 엄연한 정치인인데, 악역을 자처하기 쉽지않은 상황임에도 망설임이 없어 인상적이라는 거였다.
추 부총리는 지난달에 한 경제단체를 찾아 "기업이 연봉을 덜 올려서 인플레이션을 막아달라"고 했다. "과도한 임금인상은 고물가 상황을 심화키는데다 대·중기 임금격차를 키울 수 있다"고도 했다. 비난이 쏟아졌다. 인플레가 기업 탓이냐는 거다.
그런데 정작 기업 고위층은 고개를 끄덕인다. 한 기업 CEO는 "현실적으로나 경제학적으로 적절한 발언이었다"고 했다. 인건비 부담이 커지면 기업의 원가율이 올라가고, 이는 제품가격 상승으로 다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추 부총리의 주문은 월급을 통제하라는게 아니라 가격인상 요인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정부는 조만간 공무원 임금도 손 보겠다는 분위기다. 이를 감안하면 추 부총리의 시도는 오히려 참신하다. 이전처럼 공무원들을 먼저 때려잡고 민간이 알아서 따라오기를 바라는게 아니다. 욕을 먹더라도 민간에 먼저 신호를 보낸다. 옛날 방식으로는 변화가 없다는걸 안다는 뜻이다. 동시에 결국 경제의 주체가 민간이고 기업이라는 점도 잘 알고있다는 뜻이다.
월급에 간섭받은 민간도, 월급에 간섭받을 공직사회도 모두 추 부총리를 곱지 않은 눈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또 기업의 의사결정 최상층은 보는눈이 다르다. 다른 대기업 CEO는 "추 부총리가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에 고통을 분담하자는 시그널을 주지 않았다면 바로 뒤에 진행된 최저임금 의사결정이 그렇게 빠르게 이뤄졌겠느냐"고 했다. "공공기관 파티는 끝났다"는 말을 시작으로 진행 중인 '악역 추경호'의 행보에 사실은 꼼꼼한 밑그림이 있었고, 현재까지는 그 밑그림에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는 거다.
'퍼펙트스톰'이 몰려온다고들 하는데, 더 무서운건 폭풍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이 CEO는 "오일쇼크 이후 수요가 이끄는 구조의 인플레이션은 처음"이라며 "1970년대 언저리에 무슨일이 있었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젠 남아있지 않다"고 했다. 미국 등 선진국이 '빅스텝'으로 일관하는 것 역시 금리조정 말고는 딱히 해볼 방법이 없어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물가는 치솟고 각국의 경제블록은 가속화하는데 전쟁까지 벌어지며 원자재 수입 부담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원료를 사다가 만들어서 해외에 팔아야 하는 우리 기업들의 구조를 생각하면 확실히 스톰이라는 표현은 부족하다. 머리를 싸매 보지만 위기의 실체와 충격을 전망하는 이도, 해법을 적어놓은 교범도 없으니 현장의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불안한 시장이 가장 원하는건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된 신중하고 꼼꼼한 경제정책 설계다. 그런 상황에서 기업이 추경호를 말하기 시작했다. 경제위기 극복 리더십을 기대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악역을 자처하고 종횡무진하는 그의 다음 행보에 눈길이 쏠리는건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