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영국보다 300년 앞서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
1971년 영국 선박업계의 권위자 롱바텀 애플도어 회장을 만난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지갑에서 500원 지폐를 꺼내 거북선 그림을 가리키며 한 말이다. 이어 조선소 부지가 될 미포만(灣) 백사장 사진과 축척 5만분의 1 지도를 내보이며 "배를 사주면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다. 이 과감한 프레젠테이션 끝에 그는 롱바텀 회장의 추천서를 받아 영국 차관을 확보했다. 1974년 HD현대중공업(당시 현대건설 조선산업부)이 처음으로 인도한 선박 '애틀랜틱 배런'(Atlantic Baron)호에 얽힌 유명한 일화다.
그로부터 50여년이 흐른 19일 HD현대가 세계 최초 5000번째 선박 인도라는 이정표를 세웠다. 5000번째 선박이 필리핀 해군 초계함 '디에고 실랑'(Diego Silang)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반세기만에 HD현대가 상선과 특수선을 아우르는 글로벌 톱티어 조선사로 거듭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HD현대는 1975년 조선소 준공 1년만에 군함 기술까지 확보하겠다는 포부 아래 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전투함 '울산함' 개발에 뛰어들었다. 2000톤급 함정 설계와 건조 경험 모두 없었지만 1980년 4월 초도함 진수, 1981년 해군에 인도라는 쾌거를 달성했다. 현재까지 HD현대중공업은 106척의 함정을 인도 및 건조했다. 이 중 18척을 해외로 수출했다. 인도 완료한 함정은 △뉴질랜드(엔데버함, 아오테아로아함) △방글라데시(마두마티함) △베네수엘라(사우다드볼리바르함) △필리핀(호세 리잘함, 안토니오 루나, 미겔 말바르함, 디에고 실랑함) 등 8척이다.
상선 분야에선 명실상부 글로벌 1위로 활약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고성능 드릴십(시추선),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기술 집약적 선박 시장으로 보폭을 넓힌 게 주효했다. 2020년대 이후에는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 등 고부가 선박 사이클을 타고 글로벌 시장 리더십을 강화했다. 올 상반기에만 81척, 330만 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를 수주해 조선 부문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지난 3분기에는 조선 중간 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이 영업이익 1조538억원을 기록했는데, 분기 영업이익 1조원 돌파는 2018년 지주사 전환 이후 처음이었다.
이제는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의 한 축으로 글로벌 위상 업그레이드까지 노린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제시한 '거북선 비전'이 세계 최강 미국 해군의 재건 프로젝트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HD현대는 지난 4월 미국 최대 방산 조선사인 헌팅턴 잉걸스와 '선박 생산성 향상과 첨단 조선 기술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지난 6월에는 미국 조선사 '에디슨 슈에스트 오프쇼어'(ECO)와 '미국 상선 건조를 위한 전략적·포괄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의 통합 법인이 12월 공식 출범한 이후에는 마스가 관련 사업 추진 속도가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정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기선 회장은 '글로벌 신기술 리더십 확보'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다. SMR(소형모듈원자로)을 비롯해 수소, AI(인공지능) 등 그룹의 미래 전략 사업을 주도하겠다는 전략이다. 해상 부유식 SMR은 물론 'SMR 추진선'까지 개발하는 게 목표다. 자율운항 기술 확보, 스마트 조선소 구축 등은 숙제다. 정 회장은 지난달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CEO서밋에서 "친환경 선박 개발 및 도입은 기업의 수익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우선 과제"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선박의 운항 효율과 지속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