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AI(인공지능)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과 2000억 달러(약 293조원) 이상의 협력 방안을 발표한 건 '절대 금액' 자체보다 사업의 내용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세계 1위인 메모리 반도체는 물론 파운드리(위탁생산)와 패키징까지 모든 영역을 맡을 수 있는 삼성의 경쟁력이 부각되는 신호탄이다. AI 대전환기를 맞아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의 양대 축인 메모리와 파운드리의 '두 날개'를 동시에 펼칠 수 있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24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I 서밋' 행사 업무협약(MOU)에 따라 삼성전자는 브로드컴과 향후 5년간 2000억 달러 규모 이상의 협력을 추진한다. HBM(고대역폭메모리) LTA(장기공급계약) 등을 포함해 최소 300조원 안팎의 반도체를 브로드컴에 납품한다는 의미다.
반도체 공급이 수요를 못 따라가는 수급난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세계 최대 첨단 생산 역량을 갖춘 삼성전자가 밀착하는 차원이다. 현재 삼성은 다른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도 유사한 협력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메모리 협력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AI 인프라 투자가 급격히 확대되면서 기존 반도체 기업뿐만 아니라 구글, 테슬라 등 주요 빅테크 기업들이 너도나도 자체 AI 가속기(ASIC)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시기에 커스텀(맞춤형) 반도체 설계 분야에 강자 브로드컴과 반도체 제조 전 분야의 기술을 갖춘 삼성전자가 역량을 결합하기로 뜻을 모았다.
업계 관계자는 "이번 협력은 단순한 HBM 공급을 넘어 메모리부터 2nm(나노, 1나노=10억분의 1m)) 이하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까지 반도체 전 영역을 아우르는 전략적 협력"이라며 "삼성의 세계 유일한 '원스톱 턴키 경쟁력'이 본격적으로 활용되는 사례"라고 밝혔다. 이제 시작이라는 얘기다.
이날 행사에 한진만 삼성전자 파운드리사업부장(사장)이 참석한 것도 이런 의미가 담겼다. 한 사장은 최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미국 '선밸리 콘퍼런스' 출장에도 동행하는 등 활발한 글로벌 일정을 이어가는 중이다.
실제 속속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2나노 등 최첨단 선단공정을 중심으로 수주가 잇따르고 있다. 테슬라의 차세대 'AI6' 칩 수주에 이어 앤트로픽의 차세대 AI 칩 역시 2나노 공정을 기반으로 협력이 논의된다. 여기에 브로드컴과 이번 협력으로 차세대 고속 데이터 통신을 지원하는 통신용 반도체(WBC) 솔루션 등에 역시 2나노 이하 첨단 파운드리 공정을 적용하고 2.3D·2.5D 첨단 패키징까지 협업 범위를 넓힐 예정이다.
4나노에서도 AI 관련 HPC(고성능컴퓨팅) 분야의 성과가 계속된다. 엔비디아의 그록 3세대 LPU(언어처리장치), 삼성전자 HBM4의 베이스다이 등이 4나노 파운드리 공정으로 생산되고 있다. 이미 4나노 공정은 사실상 풀캐파(생산능력 최대치) 수준으로 가동 중이다.
이처럼 단순히 메모리 위주의 개별 제품 수주가 아니라 AI 가속기, NPU(신경망처리장치), 차량용 반도체 등 고성능·고부가 제품으로 고객과 응용처가 동시에 확대되는 흐름이다.
그동안 분기당 조단위의 적자를 내며 삼성의 '아픈 손가락'으로 불렸던 파운드리 등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적어도 2028년부터는 흑자 전환에 성공할 수 있다는 게 내부 전망이다.
한편 전영현 삼성전자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장(대표이사 부회장)은 "AI 시대에는 메모리, 로직, 첨단 패키징이 긴밀하게 통합된 반도체 솔루션이 중요하다"며 "브로드컴과 협력을 확대함으로써 미래 AI 인프라 발전을 가속화하고 고객에게 더 큰 가치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찰리 카와스 브로드컴 반도체 솔루션 그룹 사장은 "AI 인프라가 빠르게 확장되면서 반도체 생태계 전반의 긴밀한 협력이 중요해지고 있다"며 "삼성전자와 협력을 통해 다양해지는 시장의 요구에 최적화된 차세대 솔루션을 함께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