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영암 우리밀농협.우리농촌살리기네트워크
직접 수매.건조... 밀가루.국수 등 생산유통까지
밀알이 여무는 초여름은 밀 농가가 가장 예민한 시기다. 건조한 환경에서 자라는 밀은 수확기가 장마철이다. 비가 잦으면 품질이 떨어지고 수확에도 차질이 생긴다. 이런 여건 탓에 우리밀 농사는 규모를 키우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럼에도 씨를 뿌리는 사람들은 있다. 자급률 1%대, 수익성을 장담하기 어려운 국산 밀을 재배하고 수매해 제분한 뒤 빵과 국수로 만든다. 수입밀이 시장 대부분을 차지한 현실에서도 우리밀을 지켜가는 사람들이다.

농림축산식품부·국립식량과학원에 따르면 2024년 국민 1인당 밀 소비량은 38.4㎏에 달했지만 자급률은 1.3%에 그쳤다. 비식품류까지 포함한 국내 밀 시장은 2조400억원 규모, 이 중 국산 밀은 0.8%에 불과하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농부들은 9월이면 종자를 준비하고 10월에는 밭에 씨를 뿌린다. 겨울을 난 밀은 봄을 지나 6월이면 황금빛 이삭으로 여문다. 파종과 수확을 되풀이하며 우리밀은 명맥을 이어간다.
◇수매부터 제품화까지…생산자가 만든 우리밀 판로
밀 재배를 포기하지 않은 생산자들은 흩어진 농가를 모으고 직접 밀을 사들인다. 생산에 그치지 않고 저장과 가공, 유통까지 스스로 떠안으며 판로를 만들었다.
지난 9일 찾은 전남광주 광산구 한국우리밀농협에는 500톤 규모의 원통형 사일로가 줄지어 서 있었다. 전남광주 본점에만 8기가 설치돼 최대 4000톤의 밀을 저장할 수 있다. 영암에 있는 500톤급 사일로 2기까지 더하면 전체 저장능력은 5000톤에 달한다.
저장시설을 갖추는 데 그치지 않고 밀가루와 국수, 라면, 과자, 만두, 고추장·된장까지 직접 만들어 유통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농가에서 밀을 사들여도 이를 받아줄 시장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김태완 한국우리밀농협 상무는 "농가에 안정감을 줘야 하기 때문에 파종 전에 다음 해 수매가격을 결정한다"며 "많이 나오든, 적게 나오든 정한 가격에 사들인다"고 설명했다.
농가에서 수확한 밀은 이곳에서 건조와 정선, 품질분석을 거친다. 자체 건조기를 갖추기 어려운 소농을 위해 건조기 4대도 운영한다. 건조된 밀은 풍력선별기와 정선기를 지나며 껍질과 밀대, 덜 여문 알곡 등 이물질을 걷어낸다. 이어 품질분석실에서 단백질과 수분, 회분 등을 측정한다. 같은 밀이라도 품질과 용도에 따라 쓰임새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PICK!
면용 새금강, 빵용 금강·백강·황금알을 비롯해 안토시아닌을 함유한 유색밀 아리진흑, 술을 만드는 주정용 밀 등 여러 품종도 구분해 취급한다. 생산량을 늘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떤 밀을 어떤 제품에 사용할 것인지까지 나눠야 시장에서 제값을 받을 수 있다.
김 상무는 "밀을 수매해도 가져가는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생산자단체가 직접 제품을 만들어 유통하기 시작했다"며 "지금은 밀가루와 국수, 과자, 만두는 물론 장류와 밀쌀까지 제품군을 넓혀 소비처를 찾는다"고 말했다.

◇밀을 갈자마자 국수로…가격과 입맛의 벽을 넘다
전남광주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전북 김제에서는 또다른 싸움이 벌어진다. 생산된 우리밀을 어떻게 시장과 소비자에게 연결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 사무실 아래층에는 국수공장이 있고 바로 인근에는 제분공장이 붙어 있다. 밀을 갈아 밀가루로 만든 뒤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 없이 곧바로 국수를 뽑을 수 있는 구조다.
심상준 우리농촌살리기공동네트워크 대표는 "여기서 제분해 바로 국수를 만들기 때문에 비용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며 "그만큼 시장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고 영업에도 융통성이 생긴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직접 수매하는 밀은 연간 700~800톤 수준이다. 이 중 약 400톤은 SPC에 원곡상태로 공급하고 나머지 약 400톤은 자체제분한다. 제분한 밀가루의 약 20%는 아래층에서 국수로 만든다. 국수는 우리밀의 가격 약점이 가장 고스란히 드러나는 품목이다. 밀가루와 물, 소금 등 원료구성이 단순해 값비싼 국산 밀가루를 사용하면 원가차이가 제품 가격에 그대로 반영된다.
가격 못지않게 넘어야 할 벽은 소비자의 입맛이다. 국내 소비자는 오랫동안 새하얗고 쫄깃한 면에 길들었다. 국산 밀로 만든 국수는 수입산 면용 밀로 만든 국수와 특성이 다르다. 심 대표는 "쫄깃함은 조금 덜할 수 있지만 씹고 나면 구수하고 고소한 맛이 남는다"며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익숙한 밀과 맛이 다른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밀의 독특한 맛을 '맛없음'으로 받아들이는 시선도 넘어야 할 과제다. 수십 년간 수입밀에 익숙해진 소비자의 입맛을 기준으로 우리밀을 평가하면 고유한 식감과 풍미가 오히려 단점으로 인식될 수 있어서다. 최근 건강과 통곡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지는 추세다.
이런 변화는 우리밀이 소비시장에서 자리를 넓힐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소비가 늘기 위해서는 생산부터 수매, 가공, 유통까지 이어지는 기반도 함께 받쳐줘야 한다.
심 대표는 "우리밀은 생산량만 늘린다고 산업이 커지는 게 아니다. 농민이 계속 심을 수 있도록 수매가 뒷받침돼야 하고 가공업체도 물량을 소화할 시장이 있어야 한다"며 "생산과 수매, 가공, 유통, 소비가 함께 움직여야 농민도 다시 씨를 뿌릴 수 있고 우리밀 산업도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