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포인트]'한국경제 축소판' 석유화학의 위기와 부활

배성민 논설위원
2026.04.30 04:07

'빈손 시작' 한국발전과 빼닮아
中공습.중동전쟁에 직격탄 맞아
과거 외환위기, 중국특수로 극복
범용화학 탈피 정밀화학 육성을

(여수=뉴스1) 김성준 기자 = 중동상황 장기화로 나프타 수급 차질로 인해 전남 여수 국가산업단지 내 석유화학 기업들의 생산 시설 가동 중단이 잇따르고 있다. 사진은 25일 여수산단내 NCC 2공장 모습. 2026.3.25/뉴스1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사진=(여수=뉴스1) 김성준 기자

석유화학 산업의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다. 수년간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시달렸던데다 올해는 미국-이란 전쟁의 여파로 원유와 나프타 등 원자재 수급난까지 겹치면서다. 산유국이 아닌데도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은 40년 가까이 독특한 위상을 자랑해 왔다. '양념 치킨과 치맥의 본고장'인데 정작 닭고기 수입이 많은 것처럼 말이다.

거대한 유조선으로 싣고 온 값싼 원유를 비싼 석유제품으로 탈바꿈시킨 석유화학 기업들의 시작은 울산, 전남 여수, 충남 서산의 어촌이었다. 먼저 플라스틱 생산업체와 국영기업 정도가 있었던 태동기. 그 시기 현재 유화기업의 조상격인 선경합섬, 동양나일론, 한일합섬 등 섬유 회사들은 1970 ~ 80년대 한국을 먹여살렸다고 할 정도의 위상(전체 수출의 30% 안팎 점유)을 자랑했다.

소속그룹의 대표 계열사기도 했던 이들의 선택은 오일쇼크 위기를 마주하며 조금씩 달랐다. 먼저 선경합섬의 모그룹(SK(구 선경))은 1980년대 대한석유공사(1964년 설립, 현 SK이노베이션)를 인수하며 원유 정제부터 각종 소재와 섬유 원료 생산까지 이어지는 수직 계열화를 완성했다.

동양나일론의 모그룹(효성)은 나일론 등 섬유 중심에서 석유화학 소재 기술개발에 전력을 쏟았다. 그 결과 신축성이 강해 화학섬유의 반도체로 불리는 스판덱스 생산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30%이상)로 올라섰을 정도다.

한일합섬은 사정이 좀 다르다. 단일 기업 최초로 수출 1억 달러(1973년)를 돌파할 정도였던 한일합섬은 업종 전환에 실패하고 무리한 인수.합병(국제상사 인수 등) 후유증으로 90년대 중후반부터 표류했고 이내 주인이 바뀌었다.

다음은 성숙기. 국내 유화산업은 1990년 투자 자유화로 급격히 업체수가 늘었다. 중국이 개혁개방 정책으로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자 가전, 건설용 화학 소재 수요가 급증하며 한국이 파트너로 선택된 영향도 컸다. 하지만 1997년 전후 IMF외환위기로 석유화학 회사들은 고금리와 높은 부채비율 때문에 고사 직전까지 갔다. 유동성 위기를 겪던 당시 대림산업과 한화석유화학이 석유화학 부문을 하나로 통합하여 여천NCC를 설립한 것도, 롯데케미칼(당시 호남석유화학)이 현대석유화학 일부 부문을 매입한 것도 이 시기였다. 정부 주도의 빅딜이었다. 중국 수요는 여전했지만 사정은 또 바뀌었다.

2015년 삼성쪽에서 또다시 석유화학 부문을 사들인 롯데케미칼이 매해 1조 ~ 2조 영업익을 올리며 인수 차입금까지 2 ~ 3년 사이 다 갚을 수 있었던 것은 업황의 절정이었다. 하지만 그후 유화단지를 해안에 줄건설한 중국의 물량공세가 시작되며 국내 업체들은 실적 악화와 무한경쟁에 시달리게 됐다. 롯데케미칼은 위기의 한복판에 놓였다. GS칼텍스는 LG화학과 NCC 부문 통합운영을 검토 중이고 여천NCC 등도 사정은 좋지 않다. 범용 화학제품 생산에만 치우친 결과다.

전자산업이 라디오 조립 수준에서 반도체, 파운드리까지 진화한 것처럼 단순 제조를 넘어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 진화하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다. 나일론의 원조인 화학기업 듀폰은 현재는 회사의 모태격인 나일론 사업부마저 과감히 떼어내고(일부는 한국업체에도 매각) 전자재료, 수처리 등 고부가 정밀화학 기업으로 변신한지 오래다. 듀폰과 비견할 만한 글로벌 1위 화학기업 독일 바스프가 범용화학 소재부문을 여전히 고수하며 어려움을 겪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들은 또다시 시계 제로 상태에 놓여있다. 하지만 기업가정신과 자본 집약, 기술력의 결합으로 일궈냈던 '비산유국' 한국 기간산업의 잠재력까지 훼손되선 안 된다. 글로벌 항공사들은 항공유 생산 수위권인 한국을 주시하고 미국 캘리포니아 휘발유가격은 국내 정유사 업황과 직결될 정도다. 조성 당시 갯벌이었지만 이제는 땅위의 유전으로 불리는 석유화학 단지의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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