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심한 취업난에 최상위권 학생들이 계약학과로 몰리면서 전국 대기업 계약학과 지원자가 1년 새 9000명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매년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는 SK하이닉스 계약학과 지원자는 27% 급증한 반면 업황 부진을 겪는 삼성SDI 계약학과는 지원자가 30% 넘게 감소해 처우에 따른 '기업 쏠림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15일 머니투데이가 종로학원에 의뢰해 2027학년도 전국 13개 대기업 계약학과의 수시 지원 현황을 전수조사한 결과, 총 지원자는 8994명으로 전년대비 1387명(18.2%) 증가했다. 이중 절반인 675명은 SK하이닉스에 몰린 인원이다. 평균 경쟁률도 20.67대1에서 23.48대1로 상승했다.
대학과 협력해 계약학과를 운영하는 대기업은 SK하이닉스·삼성전자·현대자동차·LG유플러스·LG디스플레이·삼성SDI·LG전자 7개다. 대학이 전액 등록금을 지원하며 최소한의 졸업 요건 및 채용 기준을 통과하면 입사가 확정된다.
SK하이닉스와 연계된 3개 계약학과(고려대·서강대·한양대) 지원자는 모두 큰 폭으로 증가해 경쟁률이 평균 39.4대1을 기록했다. 서강대와 한양대는 경쟁률이 각각 66.15대1, 44.41대1로 모두 2023학년도 학과 개설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다른 유형에 비해 학교 성적 반영이 적은 논술에 지원이 폭증한 영향이다. 서강대 논술은 3명 모집에 893명이 지원해 297.67대1, 한양대 논술은 4명 모집에 844명이 지원해 211대1을 기록했다.
반면 삼성전자 계약학과는 총 5개 학과 중 4개 학과에서 지원자가 감소하면서 평균 경쟁률이 21.04대1로 집계됐다.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학과는 지원자가 18% 증가했지만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1.5% 줄었다. 또 DX(디바이스경험), MX(완제품) 부문으로 취업하는 고려대 차세대통신학과는 11%, 성균관대 지능형소프트웨어학과는 2.7% 감소했다. 경북대 모바일공학전공은 모집인원이 7명 줄면서 지원자도 21.3% 급감했다.
삼성SDI 계약학과인 성균관대 배터리학과는 모집인원이 2명 늘었음에도 지원자가 전년보다 36.2% 감소했다. 경쟁률은 10.3대 1로 크게 떨어져 SK하이닉스와 약 4배 차이가 난다. 삼성SDI도 최근 성과급 방식을 '영업이익의 10%'로 변경했지만 지난해 적자 기록 이후 2027년에나 본격적으로 영업이익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돼 수험생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LG디스플레이 계약학과인 연세대 디스플레이융합공학과도 지원자가 1.1% 줄어 경쟁률은 12.09대1을 기록했다.
현대자동차 계약학과인 고려대 스마트모빌리티학부 지원자는 10.3%, LG유플러스와 연계된 숭실대 정보보호학과는 15.1% 증가했다. 올해 신설된 LG전자 계약학과인 부산대 스마트가전공학과는 20명 모집에 603명이 지원해 30.15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수험생들이 산업 경기와 기업 실적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며 "최상위권 학생들은 타분야 계약학과에 묶이느니 정규 입사를 노리기 때문에 앞으로도 산업 경기 변화에 따라 지원 흐름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고 분석했다.
대기업과 연계된 대학들의 계약학과가 대부분 학생부종합전형(학종)으로 선발하면서 2028학년도 대입부터 적용되는 고교학점제 하에서는 고등학교 선택이 더욱 중요해진다. 각 대학은 수학, 과학의 진로선택과목을 깊이 있게 듣도록 권장하고 있는데, 해당 과목을 듣는 학생이 많아야 과목이 개설되고 다양한 탐구활동과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대입은 고입부터'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연유다.
◇ 미적분II·물리 과목 개설 여부·학종 진학실적 확인해야
14일 각 대학에 따르면 2027학년도 반도체 계약학과가 있는 5개 대학(고려대 ·서강대·성균관대·연세대·한양대)은 전체 모집정원 280명 중 210명(75%)을 수시로 선발한다. 수시 중에서 학종은 152명으로 다시 72.4%를 차지한다. 올해 고려대와 성균관대는 교과 선발이 아예 없다.
학종은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전체를 바탕으로 학업역량, 학업태도,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선발하는 방식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사실상 신입사원 채용인만큼 점수 따기 쉬운 과목을 고르는 학생보다는 학업적 흥미와 전공적합성을 중요하게 본다는 얘기다. 동시에 독서토론, 창의성 교육, 환경 교육 등에서 적극성, 공동체 의식 등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
이 같은 기조는 2028학년도에도 이어질 전망이다. 고려대는 2028학년도 대입에서 진로선택과목 중 미적분II, 역학과에너지, 전자기와 양자를 권장이수과목으로 제시하고 있다. 연세대는 과학 일반은 물리학을, 진로선택과목 중에서는 기하, 미적분II과 함께 과학 3과목 이상을 선택해야 해, 보다 난이도가 높다.
만약 고등학교에 과학 진로선택 과목이 2과목 밖에 열리지 않는다면 공동교육과정, 온라인학교 등을 통해 추가 과목을 이수할 수 있지만 완벽히 대체되기 어려울 수 있다. 일반고에 진학할 예정이라면 과목 개설 여부와 학종 진학 실적을 문의하는 게 좋다.
2026학년도 기준 수시 학종 최종 등록자 70% 수준은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1.79등급(활동우수형), 고려대는 1.47등급이었다. 한 학년이 300명인 학교라면 전교 10등 안팎이다. 여기에 자율형사립고(자사고), 과학고 등을 고려하면 일반고에서는 보다 경쟁 강도가 높아질 수 있다.
배영준 서울 보성고 진로진학상담교사는 "내신 유불리를 두려워하지 않고 물리, 전자기학 등을 공부할 수 있는 학생을 뽑고 싶어 한다"며 "계약학과는 학종 선발 비율이 높다보니 일반고보다는 특목고, 갓반고(일반고지만 대입실적이 좋은 학교)가 유리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의대보단 이공계"…과고 인기 부활에 중학생부터 '열공'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대 진학 제재에도 과학고의 인기가 다시 올라가고 있다.
지난 3일 마감한 2027학년도 전국 22개 과학고 신입생 총지원자는 6282명으로 전년 대비 680명(12.1%) 늘었다. 2017학년도 이후 11년 만에 가장 많은 수치다. 매년 12월에 모집하는 자사고도 경쟁률이 반등할지 주목된다. 자사고는 5등급 개편으로 3등급 이하를 받을 경우 일반고보다도 불리할 수 있다는 우려에 지난해 전국 평균 경쟁률이 1.22대 1을 기록, 2년 연속 하락했다.
다만 특정학과 경쟁이 심해지면서 수학 선행에 이어 과학 선행까지 점점 어릴 때부터 대입을 준비하는 분위기다. 특히 학종, 면접 등의 전형은 고액의 컨설팅의 유혹이 따르기 쉽다.
박상호 부산진로진학지원센터 연구사는 "상위대학들은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내신도 좋고, 활동도 풍부한 학생들이 넘쳐난다고 말한다"며 "역량이 좋은 학생들이 특정 학과에 쏠리는 현상이 지속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학 간판보다는 취업이 잘 되는 학과가 서열화되는 현상도 강화될 수 있다. 계약학과는 교육부 '정원 외'로 모집해 기업과 대학이 수요가 맞으면 얼마든 학과가 추가될 수 있다. 계약학과가 늘고 인기가 높아질수록 타 학과에서는 학생이 유출되는 구조다.
박 연구사는 "내년부터는 수능에서 선택과목도 모두 사라져 학과 서열이 더욱 분명하게 수치화될 것"이라며 "유명대학 문과보다 인서울 이공계의 입결이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