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공감의 힘 '라뽀르'

조우성 변호사(머스트 노우)
2016.02.14 08:33

[the L]][조우성의 로세이] "사건 해결책보다 더 중요한 의뢰인과의 교감"

절친한 대학 후배 A. 그는 정신과 전문의다. 자기 손위 처남 박모 씨에게 법률적인 문제가 생겼다며 나를 찾았다. 동업자와 이익분배 때문에 다툼이 발생했는데, 동업자가 먼저 박씨를 횡령죄로 고소했고 이에 따라 박씨가 경찰서에 소환될 처지에 놓였다는 게 골자다.

박씨는 분에 못 이긴 듯 상담 중간에 한숨을 쉬기도 하고, 고성을 지르면서 극도로 불안한 상태를 보였다. 변호사로서 봤을땐 동업자의 횡령죄 고소는 충분히 법리적 반박이 가능했다. 그래서 횡령죄 법리를 설명하고 반박자료 마련 등 대응책에 대해서도 차분히 일러줬다. 얘기를 들은 박씨는 좀 더 생각해 본 다음 사건을 위임할 지를 결정하겠다며 사무실을 떠났다.

◇ "라뽀르, 신뢰하며 감정적으로 친근감 느끼는 인간관계"

이틀 후 A가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그러면서 "죄송한 말씀인데 처남이 다른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겼다고 합니다. 애써 시간까지 내 줬는데 제 입장이 좀 난처하게 됐습니다"라고 했다. 난 손사래 치며 "별 말을 다하네. 어차피 사건이란 게 다 궁합이 맞아야 하는 거야. 나와 자네 처남이 궁합이 안 맞아 그런 걸 뭐"라며 웃어 넘겼지만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른 변호사라고 해도 법리적으로 내가 설명한 것 이상의 얘기를 듣긴 어려웠을 테니 말이다.

A가 "선배님, 혹시 '라뽀르(rapport)'가 뭔지 아세요?"라고 물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며 모른다고 하자 A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엊그제 상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면서 선배님이 라뽀르만 좀 더 갖췄으면 정말 완벽한 상담을 할 수 있고 의뢰인도 아마 사건을 의뢰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어 A는 라뽀르에 대해 친절히 설명했다. 라뽀르는 상호간에 신뢰하며 감정적으로 친근감을 느끼는 인간관계를 말하는데, 상담과 정신치료에서 치료적 관계형성에 핵심이 되는 개념으로 상담자와 내담자 간에 좋은 유대감을 만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A는 "변호사 업무를 잘 모르지만 엊그제 상담은 라뽀르 관점에서 본다면, 의뢰인인 처남과 유대감을 갖기 위한 시도는 거의 하지 않고 오로지 사건에 대한 설명만 했다"고 덧붙였다. 나는 "사건을 의뢰하러 온 사람에게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말해 주는 게 가장 바람직한 거 아닌가"라며 반문했다.

◇ "화가 난 의뢰인에 공감 표시하면서 진정시켜야"

그러자 A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처남은 동업자 때문에 격정적으로 분노했고 자신이 억울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럴 땐 일단 처남을 다독이면서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 3자인 내가 얘기를 들어도 화가 날 지경이다라고 공감을 표시해 주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의 뇌는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영장류의 뇌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람이 화가 많이 났을 땐 본능에 충실한 '파충류의 뇌' 상태가 됩니다. 그런 사람에게 아무리 논리적인 말을 해도 상대는 받아들일 자세가 안 되어 있습니다. 진정시키고 공감하면서 파충류의 뇌를 잠재운 다음 영장류의 뇌 상태를 만들어 놓고 논리적인 설명을 해야 상대가 충분히 이해를 합니다. 저 같은 정신과 의사들은 환자와 사이에 이런 라뽀르 형성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요. 변호사님들도 활용하시면 참 좋을 듯 합니다"라고 설명했다.

처음엔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A의 말이 옳은 것 같았다. 변호사를 찾아오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는 '상처받았거나 분노한' 사람이다.

나는 그 사람들 앞에서 '자, 이렇게 하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는 식의 해결책 위주로 접근하기에 바빴지, 정말 그 사람들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거나 위로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 "사건 해결책보다 더 중요한 의뢰인의 심리상태 파악"

A의 충고는 의뢰인을 대하는 방식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예전엔 의뢰인이 상담하러 오면 전화나 이메일을 통해 사건 내용을 먼저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달받은 사건 내용을 검토하고 나중에 의뢰인이 찾아오면 간단히 인사 나눈 후 바로 사건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화이트보드에 써가며 열심히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상담했다. 철저하게 '해결책' 위주의 접근이었다.

하지만 A의 충고를 들은 이후 상담하러 온 의뢰인의 사건 내용을 어느 정도 미리 파악하고 있더라도 처음 20분 간은 무조건 의뢰인에게 직접 사건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20분의 설명을 들으면서 사건 내용 자체에 대한 파악 못지않게 의뢰인의 심리 상태를 면밀히 파악한다. 의뢰인이 상처를 받았는지 아니면 화가 나 있는지. 그리고 의뢰인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변호사로서 의뢰인과 공유해야 할 중요한 정신적 상태를 가르쳐 준 A에게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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