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 오늘… '인동초' 같은 삶, 세상과 이별하다

진경진 기자
2016.08.18 05:47

[역사 속 오늘]김대중 전 대통령, 남북통일 과제 남기고 서거

2009년 8월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 마련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공식빈소에 많은 추모객들이 조문을 하고 있다. /사진=머니투데이DB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惡)의 편이다."

2009년 6월11일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식에서 특별연설을 위해 연단에 오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를 향해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휠체어를 탄 모습이었지만 당장 건강을 우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약 한달 뒤, 김 전 대통령은 폐렴 증세로 서울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한다. 이전에도 몇 차례 같은 증세로 입원한 뒤 건강을 회복했던 그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점점 증세가 악화된 김 전 대통령은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인공호흡기를 부착했다. 며칠 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일반 병실로 옮겨졌지만 바로 다음날 폐렴이 폐색전증으로 악화되면서 인공호흡기를 부착한 채 다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건강 상태가 회복되고 나빠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2009년 8월18일, 혈압과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진 김 전 대통령은 결국 눈을 감는다. 향년 83세. 이날 정오 무렵 잠깐 잠에서 깨어나 가족들과 눈빛을 맞춘 게 마지막 인사였다.

김 전 대통령의 일생은 '인동초'에 비유된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이겨낸 자신의 삶을 이것에 비유해 말했는데 후에 그의 별명이 됐다. 인동초(忍冬草)는 가녀린 잎새와 줄기로 모진 겨울을 견디며 말라죽지 않고 꽃을 피운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

전쟁 직후인 1954년, 목포에서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며 정계에 발을 들인 김대중은 첫 도전에서 낙선했다. 이후 1961년 4·19혁명으로 5월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5·16 군사 쿠데타로 3일 만에 의원직을 상실했다.

6대 총선에서 목포에 출마해 당선된 그는 7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후보를 꺾고 신민당 대선 후보가 됐다. 하지만 부정선거 논란 속에 95만표 차이로 박정희 후보에 패했다.

얼마 후 그는 8대 총선 지원을 위해 유세에 나섰는데 그가 탄 차량으로 대형 트럭이 돌진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권의 살해 기도 의혹도 일었던 이 사고로 그는 왼쪽 다리에 고관절 장애를 입고 남은 삶을 불편한 다리로 지내게 된다.

이후로도 그의 삶은 평탄치 못했다. 유신 정권 아래 5년 반 투옥, 3년여 기간의 망명, 6년 반의 가택연금 등 오랜 시간 신체의 자유를 빼앗겼다. 1980년 신군부는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지만 국제사회 여론의 영향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컸던 1987년,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됐다. 하지만 김대중·김영삼 두 야당 거목은 분열했다. 결국 정권교체는 실패하고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대통령 도전 네 번째인 1997년, 김대중은 처음으로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며 제15대 대통령에 선출됐다. 재임 기간 동안 그는 남북통일 문제에 깊은 관심을 쏟으며 임기 내내 '햇볕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김 전 대통령은 남북관계의 특성상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서로의 입장을 교환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 결과 분단 55년 만인 2000년 6월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역사적인 정상회담을 가졌다.

결과물인 6·15 공동선언에는 민족의 운명과 장래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과 전쟁 재발 방지와 평화정착을 위한 남북간 이행사항 등이 담겼다. 군사직통전화 개설, 상호 비방 중지, 파괴·전복행위 중지 등 조치와 이산가족 상봉과 비전향장기수 석방도 이뤄졌다.

같은 해 12월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한국인이 노벨상을 받은 것은 김 전 대통령이 처음이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해 살아온 공적과 6·15 남북 공동선언 등이 높게 평가 받았다. 김 전 대통령은 1986년부터 이 해까지 15번 연속으로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임기 초엔 외환위기 극복에 총력을 쏟았다. 5개 은행 퇴출로 개혁 추진 속도를 가속화하면서 재벌 빅딜(대규모 사업교환), 공기업 민형화, 노동시장 유연화정책 등 각종 개혁조치를 쏟아냈다. 부채비율은 1997년 말 472%에서 1999년 말 198%로 낮아졌다.

이와 함께 권위주의를 벗어나려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내부에서 각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도록 하고, 행정 조직 내 사무실에 걸려있는 대통령 사진도 내리도록 했다. 1년에 두 차례 정도는 TV를 통해 '국민과의 대화'를 시도했다.

2009년 8월18일. 서울광장 등 전국 각지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 분향소엔 추모객의 발길이 이어졌다. 정부는 김 전 대통령의 장례를 '국장'으로 치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 이후 30년 만이고, 전직 대통령으론 첫 국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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