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프 몰래 가져와" 패딩·니트 쌓였다…강남경찰서 앞 박스 정체

김미루 기자, 양윤우 기자
입력 2023.02.20 18:34 수정 2023.02.20 18:34
지난 16일 서울 강남경찰서 교통조사계 왼편에 놓인 튀르키예 구호물품 상자. 김종문 교통조사계 팀장이 놓아 모으고 있는 것이다. /사진=김미루 기자

"경찰이 범죄자에게 피도 눈물도 없어야겠지. 그런데 이재민한테는 눈물을 못 참겠더라고."(김종문 경감)

20일 서울 강남경찰서 교통조사계 출입문 바로 왼편에 종이상자 10개가 놓였다. 아직 펼치지 못한 새 상자도 5개다. 상자 안에 든 것은 사고 진술서나 보고서 같은 서류 뭉치가 아니다. 종이 태그가 그대로 붙은 새 니트, 털모자가 달린 해외 명품 브랜드 패딩 같은 의류와 두툼한 담요, 침낭이 담겼다. 상자 표면에 붙은 A4용지에는 붉은 글씨로 '튀' '르' '키' '예' 글자가 적혔다. 김종문 강남경찰서 교통조사계 팀장(59·경감)이 모은 구호품이다.

김 팀장이 구호품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일부터다. 그는 퇴근 후 저녁 뉴스에서 튀르키예의 강진 피해 현장을 보게 됐다. 폐허가 된 마을을 뒤로 하고 구급차에 탄 50대 여성 이재민이 보온용 담요를 머리 위에 뒤집어쓰고도 몸을 덜덜 떨었다. 여성은 인터뷰하려고 온 기자들 앞에서도 울음이 차올라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종이 태그가 붙은 새 니트를 차곡차곡 개서 상자에 정리하고 있는 김종문 경감. 상자에는 니트, 패딩 등 옷가지와 침낭, 이불 등 구호물품이 담겼다. /사진=김미루 기자

이달 초 발생한 튀르키예 강진 이후 여전히 100만명 넘는 이재민이 마을 임시 대피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사망자 수는 19일(현지 시간) 기준 4만6000명을 넘어섰다.

김 팀장은 이재민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그는 곧바로 안방 장롱을 열고 니트 등 옷가지를 10벌 챙겼다. 올해 봄에 입으려고 강남경찰서 옆 코엑스 옷 매장에서 구매해 쟁여둔 새 옷이었다. 새 온풍기도 꺼냈다. 김 팀장은 "나이가 들어서 눈물이 많아졌다"며 "장롱에 있는 옷을 다 훔쳐 와서 마누라한테 혼나게 생겼다"고 말했다.

옷을 챙긴 다음 날 출근은 저녁 7시. 김 팀장은 야간 근무를 앞두고 서울 강동구 성내동 박스 공장을 찾아 종이 상자를 15개 사 왔다. 집에 있는 옷가지와 이불을 있는 대로 챙기니 상자 3개가 금세 채워졌다. 상자 3개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던 그는 직원들의 동참을 요청했다. 김 팀장은 지난 16일부터 교통조사계 앞에 구호물품 상자를 뒀다. 20~50대 경찰서 직원에서부터 주말 축구 동호회원, 출입 기자 몇몇이 구호품을 가져다뒀다. 나흘 만에 대형 상자 10개가 가득 찼다.

특히 교통조사계 팀원들이 김 팀장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들은 새 옷·양말·방한화를 챙겨 왔다. 자녀들 옷부터 고가의 패딩을 가져온 팀원도 있었다. '비싼 걸 들고 와도 되냐'는 김 팀장의 물음에 한 팀원은 "재작년인가 한 번 입고 거의 안 입었다"며 "와이프 몰래 가져왔다"고 답했다고 한다. 다른 팀원들도 "우리가 모아봐야 몇 벌 못 모으는데 팀장님이 나서줘서 십시일반 모았다.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팀장은 "짧은 기간 모으고 끝내려고 했지만 '한 주만 더 받아달라'는 직원들 때문에 아직 못 끝낸다"고 밝혔다. 그는 오는 24일 퇴근 후 직접 인천시 중구 한국도심공항 인천물류센터를 방문해 구호물품을 전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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