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당사자가 항소를 제기한 경우, 불가피한 사유가 있다면 법에서 정한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을 늘릴 수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처음 나왔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가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을 넘겼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항소가 각하돼 재판청구권이 침해됐다'는 취지의 재판소원 8건을 심리 중인 상황에서 대법원이 선제적으로 관련 판단을 내놓은 것이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제2부(재판장 오경미 대법관)는 지난 25일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을 넘겼다는 이유로 한 항소인 A씨의 항소를 각하한 결정을 파기하고 사건을 원심 법원으로 돌려보냈다.
A씨는 지난해 5월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장을 제출했다. A씨는 항소심 진행을 위해 1심과 동일하게 '국민기초생활 보장법'에 따른 수급자로서 소송비용 전부에 대해 소송구조를 신청했다. 문제는 소송구조 결정이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에 임박하게 이뤄지면서 불거졌다.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 만료일 4일을 남기고 A씨에 대한 소송구조 결정이 내려졌다. 송달 절차도 지연되면서 A씨는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 만료일이 지나고 소송구조 결정이 내려진 사실을 알게 됐다. 원심 재판부는 기계적으로 A씨 항소를 각하했다. 이후 A씨가 이 같은 각하 결정을 취소해 달라며 문제를 제기했다.
민사소송법의 제402조의 2에 따르면 항소장에 항소이유서를 적지 않은 항소인은 항소기록접수 통지를 받은 날로부터 40일 이내에 항소이유서를 항소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또 항소인의 신청이 있다면 법원의 결정에 따라 1회에 한해 1개월 연장이 가능하며 기간 내에 항소이유서를 내지 않으면 원칙적으로 항소를 각하해야 한다.
쟁점은 항소인이 책임질 수 없는 사유 등으로 제출 기간 만료일까지 항소이유서를 내지 않은 경우 법원이 그 기간을 늘릴 수 있는지였다.
대법원은 결정을 내리면서 "민사소송법에서 말하는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은 불변기간이 아니다"라고 판단했다. 항소인이 책임질 수 없는 사유 등이 존재한다면 재판청구권 보장을 위해 제출 기간을 늘릴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은 "항소이유서 의무 제출제도의 도입으로 항소인이 입게 되는 불이익이 헌법 제27조 제1항의 재판 받을 권리가 침해되는 정도에까지 이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A씨 사례처럼 법원의 소송구조 결정 및 송달 절차가 지연됨에 따라 변호사 조력을 받지 못한 상태였던 점은 당사자가 책임질 수 없는 사유라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또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 내에 항소이유서가 제출되지 않았단 사유를 들어 곧바로 항소를 각하해선 안 된다"며 "제출 기간이 지났더라도 기간을 늘릴 수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지를 살펴봤어야 한다"고 했다. 대법원은 제출 기간이 '불변기간'으로 법에 명시되지 않은 점도 고려했다. 같은 법 제172조의 제1항에 따르면 법원은 불변기간을 제외하고 법정기간 또는 법원이 정한 기간을 늘리거나 줄일 수 있다.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 관련 제도는 시행 이후 민사 법관들 사이에서도 "당사자의 재판받을 권리를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항소이유서 의무 제출 제도는 2024년 1월16일 개정된 민사소송법에서 도입됐다.
이 사안은 헌재 전원재판부에 회부된 8건의 재판소원 사건의 쟁점이기도 하다.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을 넘겨 각하 결정을 받은 당사자들이 해당 결과를 취소해 달라며 낸 재판소원이 총 8건 심리 중이다. 이와 별개로 항소이유서 제출 기간을 넘기면 항소를 각하해야 한다는 조항이 위헌이라는 취지의 헌법소원도 3건이나 헌재가 심리 중이다.
이번 대법원 결정은 재판소원 도입 이후 벌어지고 있는 두 기관 사이 묘한 기싸움의 산물이라는 분석도 있다. 재경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헌재가 8건이나 심리하며 대대적으로 결정을 내리려 한 사안으로 보이는데 대법원이 먼저 결정을 내려 헌재 결정의 중요도를 낮추려 한 의도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