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점자 '훈맹정음'이 발표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시각장애인이 점자를 배우고 필요한 책을 읽는 데는 여전히 어려움이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점자 교육기관을 확충하고 도서 제작을 위한 제도를 개선하는 한편, 일상 속 점자 활용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수아 송암점자도서관장은 4일 서울 용산구 국립서울맹학교 용산캠퍼스에서 열린 '2026년 훈맹정음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시각장애인의 자립을 위해서는 점자 교육이 기본이 돼야 한다"며 "각 지역에 전문 교육기관을 마련해 누구나 가까운 곳에서 원할 때 점자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국립한글박물관이 주최한 이날 학술대회에는 한글 점자 전문가와 박물관·맹학교 관계자, 시각장애인 당사자 등이 참석해 점자의 의미와 활용 확대 방안을 논의했다.
저시력 시각장애인인 박 관장은 점자를 배우기 전 책을 읽지 못했던 경험도 소개했다. 그는 "16살의 나이로 맹학교에 입학했지만 눈앞에 있는 책을 읽을 수 없어 좌절감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손가락이 얼얼해질 때까지 점자를 연습한 끝에 처음 읽은 책은 '몬테크리스토 백작'이었다. 박 관장은 "그제야 '나도 책을 읽을 수 있구나' 하는 벅찬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디어가 발전하면서 음성 지원 프로그램 등 보조 도구가 생겼지만 시각장애인이 정보를 습득하는 근본적인 수단은 점자"라며 "문자를 해독하고 읽고 쓸 수 있게 하는 점자는 시각장애인에게 기본적인 문자교육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점자도서 제작에 필요한 출판사 파일을 원활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현행 도서관법은 국립장애인도서관의 요청을 받은 출판사가 30일 이내에 관련 파일을 제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 제출하지 않을 수 있어 현장에서는 제도의 실효성이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박 관장은 점자 대체자료 제작용 파일 제공을 의무화한 프랑스 사례를 소개하며 "특히 지금과 같은 디지털 전환기에 시각장애인의 정보 접근성 개선이 집중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점자의 발전과 활용 과정에서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주도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주윤정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훈맹정음을 창제한 송암 박두성 선생은 시각장애인 제자들과 모여 어떤 점자안이 좋은지 투표까지 거치는 등 당사자가 직접 참여하는 과정을 거쳤다"며 "점자는 시각장애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자립하고 참여할 수 있게 한 결정적 토대"라고 설명했다.
점자의 활용 범위를 책 밖의 일상으로 넓히려는 사례도 소개됐다. 식품업체 오뚜기는 시각장애인 소비자의 의견을 반영해 컵라면 용기에 점자와 전자레인지 조리 기호를 도입했다. 손끝으로 물 높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용기 외부에 물선도 표시했다.
이재혁 오뚜기 마케팅팀 담당자는 "시각장애인이 스스로 원하는 제품을 고르고 조리할 수 있는 '식사 독립성'을 찾는 데 일조하고자 했다"며 "유니버설 디자인은 소수를 위한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모두를 위한 표준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