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야구가 2026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또 한 번 세계와의 격차를 확인했다. 문제는 단순히 공이 느리다는 데 있지 않았다. 빠른 공을 던지는 유망주는 조금씩 늘고 있지만, 그 공을 실전에서 완성도 있게 활용하는 투수는 충분히 나오지 않고 있다.
이번 WBC에서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는 구속이었다. 미국 야구 통계 매체 베이스볼서번트에 따르면 이번 대회 한국 투수들의 직구 계열(포심 패스트볼, 싱커, 커터) 평균 구속은 시속 90.1마일(약 145㎞)로 본선 20개 팀 중 18위, 세계 최하위 수준이었다. 하지만 한국도 선수층이 얇아 체감이 덜할 뿐, 조금씩 강속구 투수들은 나오고 있다는 것이 현장의 의견이다.
고교 감독 A는 최근 스타뉴스와 통화에서 "올해만 해도 전국에 시속 150㎞ 공을 던지는 투수가 20명을 넘었다. 그게 평균 구속은 아니겠지만, 그만큼 구속이 빨라진 건 분명하다. 3~4년 전만 해도 시속 145㎞를 넘겨도 타자들이 방망이를 못 쫓아갔는데 지금은 빠른 공을 더 잘 친다. 그만큼 타자들도 빠른 구속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의 시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내 한 스포츠 트레이너 B는 "앞으로 구속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그동안 한국 야구 유망주들은 몸을 만드는 단계에서 그저 코치, 선배들을 흉내 내고 개개인의 특성에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따라 하는 데 그쳤다"고 밝혔다.
그러면서도 "2004~2005년생쯤부터는 야구를 시작할 때(초등학교 3~4학년)부터 개인 레슨장을 이용하는 것이 익숙해진 세대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체계적으로 몸을 쓰는 걸 배우면서 중학교 졸업 시점에서는 웨이트 트레이닝을 마스터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아이들이 몸 쓰는 기본적인 퀄리티가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들은 더 나올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표팀 마운드의 문제는 프로 단계에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다. 고교 시절부터 빠른 공만으로도 통하는 환경에서 제구와 변화구, 타자와의 수 싸움을 충분히 익히지 못한 채 성장하는 구조와도 맞닿아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대회를 통해 구속만큼이나 투수로서 완성도를 신경 써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최고 시속 150㎞의 빠른 공은 아마야구 수준에서는 그 자체로 위력적이다. 나무배트 환경에서는 정타가 아니면 장타로 이어지기 어렵다 보니, 일부 투수들은 스트라이크 존 안에 빠른 공만 넣어도 쉽게 아웃카운트를 잡는다. 고교 감독 C는 "이번 WBC에서 류현진처럼 싸울 줄 아는 투수가 없었던 것 같다. 빠른 공이 아니어도 타자와 싸울 줄 아는 투수가 돼야 하는데 요즘은 그런 선수가 많이 없다"고 한탄했다.
2004년 대한야구협회(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가 고교야구에 도입한 나무배트는 한국 아마야구의 흐름을 크게 바꿨다. 반발력이 낮은 나무배트는 정타가 아니면 장타로 연결되기 어렵다. 이 환경에서는 시속 150㎞ 안팎의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제구와 변화구 완성도가 부족해도 결과를 내는 경우가 생긴다. 고교야구의 '강속구 거품'을 가리는 요인 중 하나로 나무배트가 지목되는 이유다.
몇 년째 이어지는 투고타저의 흐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투·타 모두에 재능이 있다면 지명 가능성이 높은 투수를 택하는 선수와 학부모가 대부분이다. 반면 야수 유망주는 타격과 수비 모두를 잘해야 상위 지명 확률이 높다. 장비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투수와 달리 타자에게는 최소 30만 원 이상 하는 나무 배트 가격 부담도 만만치 않다.
고교 감독 A는 "공이 한가운데로 들어와도 힘없는 타자들이 나무배트로 치면 쉽게 아웃된다. 하지만 알루미늄 배트는 타이밍이 늦어도 안타가 나온다. 처음엔 투수들이 고전할 수 있지만, 살아남으려면 제구가 돼야 하고 그러다 보면 더 좋아질 수 있다"고 했다.
지금 말하는 비목재 배트와 알루미늄배트는 흔히 코인 배팅장에서 쓰는 깡통 배트와 다르다. 비목재 배트는 합금(알로이), 탄소섬유(컴포지트), 하이브리드 등 나무가 아닌 재료로 만들었다. 나무 배트보다 상대적으로 내구성이 뛰어나고 인위적으로 품질을 조절할 수 있어 성능이 균일하다. 이미 중학교 이하 유소년 선수들은 반발력을 조절한 알로이 배트를 쓰고 있다. 알로이 배트는 나무 배트 한 자루보다 가격은 비싸지만, 한 자루로 1년은 거뜬히 버틴다.
현장에서 비목재 배트로 바꾸자는 의견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동안 비목재 배트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의 주된 근거는 값비싼 나무 배트 가격이었다. 최근 아마야구 선수들이 찾는 나무 배트는 환율 상승과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한 자루에 최소 30만 원에서 60만 원 사이를 오간다. 빗겨 맞아도 방망이가 깨지는 탓에 타자 유망주와 학부모 입장에서는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오래된 패러다임을 바꾸기 위해선 조금 더 확실한 명분과 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고교 감독 D는 "20년 전 나무 배트로 바뀔 때 명분은 알루미늄 배트가 만든 강한 타구에 아이들이 다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사고도 있어 나무배트로 바꾸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떠올렸다.
이어 "나도 비목재 배트로 바꾸자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방법론적인 면에선 찬성한다. 그러나 단순히 비용 때문에 다시 비목재 배트로 바꾼다고 하는 건 적절치 않다. (협회 공인) 국내외 업체 비율이나 적절한 반발계수는 어떻게 할지 등 확실한 기준과 논의를 하고 진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무 배트 가격이 갈수록 학생들에게 부담이 있다는 건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하지만 비목재 배트 도입이 당장의 투수들에게는 불리하게, 약팀 입장에서 자칫 강팀과 격차가 벌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어 섣불리 변화를 시도하진 못했다. 아마야구 현장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고교야구감독자협의회에서 비목재 배트 전환 여부를 두고 의견을 모았다. 하지만 나무배트 유지 의견이 한 표 차로 앞서 현행 체제가 유지됐다.
다만 이번 WBC 대회를 계기로 더 이상 변화를 미룰 수 없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 WBC 세 대회 연속 1라운드 탈락과 국제대회 대만전 2연패로 귀결되는 국제 경쟁력 상실로 이어졌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즐비한 도미니카 공화국에는 0-10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다. 계속된 국제 경쟁력 상실은 결국 프로야구 흥행과 아마야구 저변 확대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기에 전반적인 시스템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것이 현장의 목소리다.
비목재 배트 전환은 그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미국 고교·대학 야구는 BBCOR(Batted Ball Coefficient Of Restitution) 기준의 비목재 배트를, 일본 고교야구는 반발력을 조절한 금속 배트를 사용하고 있다. BBCOR은 배트의 반발력을 평가하는 지표로 반발 계수 0.5를 넘지 않아야 한다.
고교 감독 A는 "가장 야구를 잘한다는 미국과 일본도 이미 비목재 배트를 쓰고 있다. 기껏 나무 배트에 적응했더니 다시 돌린다고 하기엔 당장 중학교 때도 알루미늄 배트를 쓰던 아이들"이라고 짚었다. 이어 "과거와 달리 반발력은 조절할 수 있다. 그렇게 타자들은 나무 배트보다 더 자신 있게 방망이를 돌릴 수 있다. 투수들은 그걸 이기기 위해 더 제구와 변화구에 신경 쓰게 되고, 그러면 우리 야구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
비목재 배트 전환이 한국야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빠른 공만으로 통하는 환경을 바꾸고, 타자와 투수 모두에게 더 높은 수준의 적응을 요구하는 출발점은 될 수 있다. 22년 전 선택이 한국 고교야구의 한 시대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다음 20년을 위한 기준을 다시 논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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