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차전지 핵심소재인 전해액 전문기업 엔켐이 미국 자회사 엔켐아메리카의 나스닥 합병 상장을 통한 자금 조달을 추진한다. 해당 회사는 엔켐의 연결기준 매출액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핵심 자회사다. 이번 상장 추진은 금융당국이 발표한 '중복상장 규제'에 해당돼 성사 여부에 관심이 집중된다.
2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엔켐은 지난 15일 엔켐아메리카와 나스닥 시장에 상장된 싱가포르 회사 '더 그로우허브'(THE GROWHUB LIMIT)와 합병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번 합병은 SPC(특수목적회사)를 이용하는 방식으로 현금 거래 없이 지분 거래만으로 이뤄진다 .거래가 종결되면 엔켐이 더 그로우허브 지분 85%를 확보하고, 더 그로우허브는 엔켐아메리카 지분 100%를 보유한다.
이를 위해 더 그로우허브는 다음달 5일 임시주총을 열고 발행주식 수 확대 등 합병을 위한 안건을 의결할 예정이다. 정관 변경 등이 완료되면 다음달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합병신청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이번 합병은 엔켐아메리카의 미국 상장을 통한 자금조달 목적이다.
앞서 금융당국은 자회사의 중복상장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추진시 모회사 이사회에 5대 의무(주주 영향평가, 주주보호 방안 마련, 주주소통, 이사회 결의, 공시)를 부과하고 독립적 특별위원회를 통해 심의·의결을 거치도록 했다. 이는 자회사를 해외 시장에 상장할 경우도 포함됐으며 시행 시점은 이달 말부터다.
국내에서는 최근 덕산하이메탈의 자회사 덕산넵코어스와 다산네트웍스의 자회사 디티에스(DTS)가 상장예비심사 승인을 받으며 첫 중복 상장 규제 예외 기업으로 인정받았다. 두 기업은 모두 최근 임시주총을 열고 자회사 상장 안건을 특별결의 안건으로 상정해 90% 이상의 찬성표를 받아 가결했다. 이들은 자회사의 사업이 모회사와 달라 기업가치 분산이나 일반 주주가치 훼손 우려가 크지 않다는 점을 강조해 주주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다.
다만 엔켐은 상황이 다르다. 이번에 상장을 추진하는 엔켐아메리카는 본사와 같은 사업을 영위하고 있으며 지난해 말 기준 총자산 2226억원, 순자산 1309억원, 매출액 1640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엔켐의 연결기준 매출액(3127억원)의 절반에 해당한다. 핵심 자회사를 해외 증시에 상장시킨다는 점에서 모기업의 기업가치가 분산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엔켐 관계자는 "이번 상장은 금감원의 중복상장 가이드라인을 철저히 준수할 것"이라며 "향후 배당가능이익 발생 시 단계적 주주환원 정책을 실시하고 이를 기업지배구조 보고서에 명문화하기로 결의하는 등 시장에서 우려하는 주주가치 훼손(쪼개기 상장) 가능성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해명했다.
엔켐이 중복상장 규제에도 불구하고 자회사 상장을 강행하는 배경은 실적 악화에 따른 유동성 압박 때문으로 풀이된다. 엔켐의 연결기준 영업손실은 2024년 504억원, 지난해 783억원에 이어 올해 1분기에도 242억원에 달한다. 대규모 손실이 이어지자 현금성자산은 72억원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수백억원의 금융자산이 있지만 상당 부분 담보로 잡혀 사용이 어려운 상태다. 반면 수개월 안에 상환해야 하는 단기 차입금은 1500억원에 달한다.
단기차입금과 별도로 2023년부터 총 3600억원 규모 CB(전환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올해 1분기말 기준 미상환 사채 총액은 2800억원에 달한다. 해당 CB의 전환가액은 최소 6만2937원에서 최고 11만2700원이다. 전날 엔켐의 종가가 1만9150원에 그친다는 점을 고려하면 미상환분 CB 대부분이 상환청구 대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엔켐은 최대주주였던 오정강 대표가 지난 3월 반대매매를 맞으면서 지분율이 기존 13.18%에서 3.52%로 급감했다. 지분율이 낮아진 만큼 메자닌 등을 통한 자금조달에 나설 경우 경영권 지분 희석 우려가 있다. 지난 4월에 오 대표가 지분 100%를 보유한 와이어트그룹이 담보 대출을 받아 엔켐 지분 9.41%를 추가로 확보한 것도 경영권 강화 차원으로 풀이된다.
엔켐아메리카와 더 그로우허브의 합병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다. 더 그로우허브가 지난해 감사보고서를 제출하지 못하고 주가가 1달러를 밑돌며 상장 폐지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지난 16일 더 그로우허브는 SEC와의 청문회에서 추가 자료를 요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사안의 결과가 나오려면 2~4주가 걸릴 것으로 보인다.
더 그로우허브는 해당 소식이 전해지자 주가 급등락을 반복하고 있다. 합병 사실을 공시한 지난 15일 23.17%, 16일 86.62% 급등했다가 17일에는 42.11%, 20일에는 33.66% 급락했다.
엔켐 관계자는 "당장 유동성 확보를 위해 7~8월 중 800억~1000억원 규모의 브릿지 대출을 진행 중"이라며 "국내 증권사를 통한 자금 조달도 추진하고 있으며 자회사 상장이 완료될 경우 2000억원 이상의 대규모 자금조달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