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5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등 관세 부과 조치가 적법했는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심리를 진행했다. 지난 4월 트럼프 행정부가 전세계를 상대로 부과한 상호관세의 위법성을 가리는 첫 공개변론이다.
CNN에 따르면 미 연방대법원은 이날 오전 10시께부터 약 3시간 동안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에 근거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부과 조치가 적법했는지에 관한 변론기일을 진행했다. 트럼프 2기 IEEPA 관련 관세는 상호관세와 펜타닐(마약성 진통제) 관련 관세가 해당된다. 방청석에는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 등 트럼프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이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초 직접 방청을 검토했으나 심리를 사흘 앞두고 "이 결정의 중대성을 흐리고 싶지 않다"며 불참 의사를 밝혔다.
이날 심리의 핵심 쟁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부과한 상호관세가 적법한지 여부다. 1977년에 제정된 IEEPA는 외국의 행위로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통령이 수출입 제한 등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한 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이 법에 따라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가별로 상호관세를 부과해 왔으나, 1심과 2심은 대통령에게 그럴 권한이 없다고 판단했다.
정부 측을 대리한 존 사우어 법무차관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비상권 발동은 만성적인 무역적자가 미국 경제와 안보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며 관세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사우어 차관은 또 "이 같은 조치가 여러 무역 협상을 타결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됐다"며 "만약 이를 되돌릴 경우 미국은 더 공격적인 국가들의 보복에 노출되고 경제·안보 면에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반면 소송을 제기한 중소기업 측 대리인 닐 카티알 변호사는 "관세는 곧 세금이며 과세권은 헌법상 의회에만 부여돼 있다"고 반박했다. 그는 "IEEPA가 언제든, 어떤 나라든, 어떤 품목이든 대통령이 임의로 관세를 부과하고 바꿀 수 있는 권한까지 위임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며 "정부가 이번에 승소한다면 의회의 권한은 사실상 돌이킬 수 없게 된다"고 강조했다.
연방대법원은 6대 3으로 보수성향 대법관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트럼프 행정부에 유리한 구조로 평가되지만 이날 변론에선 보수 성향의 법관들도 트럼프 행정부를 향해 연거푸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과거 지미 카터 대통령이 IEEPA에 근거해 이란 자산을 압류했던 것을 법원이 적법하다고 판단했다고 강조한 행정부 측 변론에 대해 "해당 판결은 매우 제한적이었다"며 제동을 걸었다. 또한 "그것(IEEPA)이 관세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됐던 전례는 없다"며 행정부 주장의 근본적 문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행정부 측이 IEEPA에 근거한 관세는 세수 증대가 아니라 산업 규제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도 대법관들은 문제를 제기했다.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1기 때 지명한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은 그러한 규제가 관세 부과까지 포함하는 것인지, 또 전례가 있는지 질문했다. 진보 성향의 소니아 소토마요르 대법관은 "관세가 세금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세금이 맞다"고 지적했다.
보수파로 분류되는 닐 고서치 대법관은 "의회가 관세 부과라는 헌법적 권한을 (대통령에게) 위임할 수 있다면 그 이외에 또 무엇을 위임할 수 있는가"라며 "의회가 대외 무역 규제나 대외 선전포고에 대한 모든 권한을 대통령에게 넘기는 것을 무엇으로 막을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 진보 성향의 케탄지 브라운 잭슨 대법관은 의회가 IEEPA를 제정할 때 대통령의 비상권한을 제한하려고 노력했다고 주장하며 대통령에게 무제한적 권한을 부과한다고 법률을 해석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배럿 대법관은 행정부 변론 말미에 "국방 및 산업 기반에 대한 위협 때문에 모든 국가에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것이 피고 측의 입장이냐"며 "일부 국가는 이해가 가지만 왜 그렇게 많은 국가들이 상호관세 정책의 대상이 돼야 했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뉴욕타임스(NYT)와 CNBC 등 미국 언론들은 보수적 대법관들을 포함해 다수 대법관들이 행정부 측 주장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고 평가했다. 대법원은 양측 주장을 들은 뒤 변론을 종결했고 즉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다.
한편, 1심인 국제무역법원(CIT)은 만장일치(3대 0)로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조치가 위법해 무효라고 판단했다. IEEPA가 대통령에게 무제한적인 관세 권한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판단이다. 항소법원 역시 7대 4로 원심을 유지했다.
미국 대법원은 6대 3으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간 대체적으로 트럼프 행정부에 보조를 맞추는 모습이었으나 이번에도 행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놓을지는 미지수다. 만약 대법원이 원심 판단을 따를 경우 관세 정책이 무효화되며 이미 징수한 세수까지 환급해야 해 상당한 혼란이 빚어질 전망이다. 미 세관국경보호청(CBP)에 따르면 지난 9월23일까지 기업들이 납부한 IEEPA 관세 규모는 약 900억달러(약 128조7900억원)로 이는 9월30일에 종료된 2025 회계연도 전체 관세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