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거짓 정보를 골라내려고 했던 과거와 달리 어느 순간부터 모든 정보가 가짜라고 전제하고 진짜가 무엇인지를 찾고 있더라."
지난 14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만난 미국 현대미술가 트레버 페글렌은 "이란전쟁이 터졌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하려고 소셜미디어를 보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며 이같이 밝혔다. 인공지능(AI)이 만든 '합성 현실'이 인간의 인식체계 자체를 흔드는 시대가 됐다는 것이다. 페글렌은 "우리는 이제 글 뒤에 저자가 없고 사진 뒤에 사진작가가 없을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LG 구겐하임 어워드' 수상자로 선정된 페글렌은 AI, 감시 기술, 데이터 인프라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경고해 온 작가다. 그의 작업은 안락한 작업실을 벗어나 사막을 건너고 해저 케이블을 찾아 바다로 들어가는 고된 '현장'을 고집한다. 페글렌은 "클라우드, 사이버스페이스처럼 은유적인 표현은 기술이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지만 현장에 나가면 다르다"며 "데이터 센터나 인터넷 케이블을 마주하는 순간 기술이 추상적인 디지털 신호가 아니라 인간의 노동과 사람 그 자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고 말했다.
그가 이토록 집요하게 '보이지 않는 인프라'를 시각화하는 이유는 우리가 발을 디딘 역사적 순간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제안하기 위해서다. 학술 논문이 논리적인 논증으로 이성을 자극한다면 예술로서의 이미지는 텍스트가 침범할 수 없는 영역에서 인간의 지각 틀을 근본적으로 뒤흔든다는 것이다.
텍스트를 건너뛰고 지각을 타격하는 그의 작품은 상상 이상으로 직설적이다. 관객 참여형 프로젝트 '이미지넷의 얼굴들'은 AI가 카메라 앞에 선 관객을 어떤 범주로 분류하는지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통해 편견을 학습한 AI가 얼마나 차별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지를 드러냈다. 페글렌은 "과거에는 오염된 정보 속에서 '가짜를 찾아내 제거하는 것'이 과제였지만 생성형 AI가 출현한 뒤엔 모든 인공 저작물을 기본적으로 거짓이라고 설정하고 시작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그야말로 가짜를 거르는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이런 가치의 전도는 문화와 사회, 정치를 지탱하는 진실의 기반을 위협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빅테크들이 앞다퉈 '책임감 있는 AI'를 외치고 생산성을 찬양하지만 자본의 압박 속에서 알고리즘의 편향성과 유해성 같은 부작용은 교묘하게 은폐된다는 얘기다.
페글렌은 "이제는 무언가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결과를 어떻게 피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며 "'우리가 기술을 어떻게 사용하고 싶은가'뿐 아니라 '기술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훨씬 더 본격적으로 이뤄져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내내 그의 눈은 이미 또 다른 현장을 향하고 있는 듯했다. 기계가 세계를 지각하는 시대, 페글렌은 우리에게 묻고 있었다. 우리는 과연 기술을 통제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계가 구축한 시뮬레이션의 세계 속에 갇혀 가고 있는가. 그 집단적 성찰의 촉매제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페글렌이 여전히 사막과 심해를 구르는 이유다.
☞ 올해 4회째를 맞은 LG 구겐하임 어워드는 'LG 구겐하임 아트 앤 테크 파트너십'의 대표 프로그램으로 기술을 활용해 혁신적인 예술 활동을 펼치는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수상자는 상금 10만달러와 트로피를 받는다. 앞서 미국 트랜스미디어 아티스트 스테파니 딘킨스, 대만계 미국인 넷아트 선구자 슈리칭, 한국 미디어 아티스트 김아영 작가가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