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인 스페인을 상대로 '무역 중단'을 공개적으로 압박한 끝에 나토 방위비 증액을 끌어냈다고 주장했다.
그간 관세를 앞세워 통상 협상에서 우위를 점해온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에는 무역 관계 자체를 방위비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한 셈이다. 경제를 협상 무기로 삼는 '트럼프식 거래 외교'가 동맹국을 상대로 한층 노골화됐다는 평가다. 주한미군이 주둔하는 한국 역시 향후 방위비 분담금 협상에서 통상 문제와 연계된 압박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튀르키예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 참석 후 미국으로 향하던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서 스페인이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를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내가 스페인과의 무역을 중단하겠다고 하자 그들(스페인)은 (미국의) 막대한 지급 요청을 존중하고 이행하겠다고 했다"며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들과 대화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언급한 '지급'이 구체적으로 어떤 비용을 의미하는지, 스페인 측 누구와 관련 내용을 논의했는지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스페인이 이란을 상대로 한 미국·이스라엘의 전쟁을 지원하지 않고, 나토 방위비를 충분히 내지 않고 있다고 지적해 왔다. 특히 이날 나토 정상회의에선 이런 이유로 스페인과의 모든 무역 관계를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스페인은 형편없는 나라다. (이란 전쟁에) 참여하지도 않고 돈도 내지 않는다"며 "나는 스페인과 아무 관계도 맺고 싶지 않다. 스페인 방문을 비롯해 모든 무역 관계를 끊겠다"고 말했다. 이어 "(스페인은) 희망이 없는 나쁜 사람들이다. 다른 나라들도 몇 곳 있지만, 특히 스페인이 그렇다"며 스콧 베선트 재무장관에게 스페인과의 무역 중단을 지시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재무부가 상무부, 미국 무역대표부(USTR)와 협력해 며칠 안에 스페인에 대한 수출입 금지 목록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더힐은 "무역 전문 변호사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스페인산 제품에 대한 전면 또는 부분적인 수출입 금지를 부과하기 위해 국제비상경제권법(IEEPA)을 발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스페인을 정조준한 배경에는 나토의 새로운 방위비 목표가 있다. 나토는 회원국들의 국방 관련 지출을 GDP(국내총생산)의 5% 수준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스페인은 현재 GDP 대비 2% 수준에서 2.1% 이상은 올리지 않겠다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스페인이 이란 전쟁 관련 미국에 자국 영공과 군사기지 사용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트럼프 대통령의 불만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현재 미국이 멕시코와 캐나다와 공동 주최 중인 2026년 북중미 월드컵과 골프에 대해 논의했을 뿐 방위비 지출에 대해선 논의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산체스 총리는 "스페인은 지난 2년간 나토 회원국 중 가장 빠르게 국방비를 늘린 국가 중 하나"라며 "스페인과 미국은 집권 정부의 이념적 성향과 관계없이 매우 강력한 경제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강조했다.
스페인 총리실은 미국과의 무역 중단 가능성에 선을 그었다. 총리실은 "스페인이 미국과의 교역에서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있다"며 "양국 경제 관계는 정부가 아닌 민간 기업들이 구축한 것이고 EU(유럽연합)의 관세 및 무역 규정상 특정 회원국만 별도로 제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미국 인구조사국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 미국의 대(對)스페인 무역수지는 수출액 22억달러(약 3조3150억원), 수입액 18억달러 이상으로 미국의 무역 흑자다.
주요 외신은 이번 사례를 단순한 스페인과의 갈등이 아닌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으로 평가했다. 실제 무역 중단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동맹국과의 무역 관계까지 안보 협상의 카드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다. 경제와 안보를 하나의 협상 테이블에 올리는 '트럼프식 거래 외교'가 더욱 선명해지면서,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안보 동맹국들도 향후 방위비와 통상 문제가 결합한 협상 압박에 직면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