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생산적 금융' 기조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다. 실수요자의 대출 절벽과 주택 공급 부족 문제가 부각되자 정부가 주택공급을 위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까지 '생산성 높은 활동'으로 규정하며 적극적인 자금 공급을 주문해서다. 부동산에 쏠린 자금을 첨단산업 등으로 돌리라는 주문에 맞춰 여신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온 은행권에선 혼선과 당혹감이 감지된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위원회는 8·13 대책을 통해 "주택공급을 위한 PF 자금지원은 정부 기조인 '생산적 금융'과 배치되지 않는 생산성 높은 활동으로 적극 지원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은행권에선 혼선이 일었다. 생산적 금융은 가계대출과 부동산, 임대업 등에 쏠린 자금을 첨단산업과 혁신기업 등으로 이동시키겠다는 것이 핵심인데, 정부가 주택공급 PF를 생산성이 높은 금융으로 새롭게 규정했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그간 정부 기조에 발맞춰 부동산·임대업 대출 비중을 줄이고 기업금융을 확대하는 방식으로 여신 포트폴리오를 조정해왔다.
금융위는 지난달 28일 5대 은행과 건설업계 등을 불러 '금융·건설업계 정례 간담회 킥오프회의'를 열고 기존 PF 사업장에 대한 신속한 여신 심사와 자금 집행을 독려하는 한편, PF 공급을 늘릴 아이디어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은행·보험업권이 2024년 조성한 PF신디케이트론에 대한 자금 승인을 빠르게 할 것을 주문했다. 당초 1조원 규모로 조성됐던 이 신디론은 2년간 6건(7326억원) 승인에 그쳤는데, 정부는 8·13 대책에서 이를 5조원 규모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다만 정부의 요구에도 은행권이 PF 자금 집행 속도를 높이는 데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부동산금융 담당 부서가 기존 사업장의 대출 집행을 서두르려 해도, 승인 권한을 가진 심사·리스크 부서는 부실 가능성을 이유로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전해졌다. PF신디론도 5대 은행이 모두 승인해야 자금 집행이 이뤄지는 만큼 빠른 실행은 기대하기 어렵단 전망도 나온다.
한 은행 관계자는 "사업성이 확실하고 분양이 잘 될 것으로 예상되는 사업장은 이미 금융회사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자금조달이 지연되고 있는 사업장은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심사나 리스크 담당 부서에서는 '부실이 나면 어떻게 하느냐'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적극적인 자금공급 과정에서 부실이 발생하는 경우에도 금융회사 임직원의 책임 부담을 낮추기 위해 면책 방안까지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징계와 대출 부실에 따른 은행의 손실은 별개의 문제란 점에서 부담은 여전하다.
이 관계자는 "사업장이 부실화돼 손실이 발생하면 결국 은행이 떠안아야 한다"며 "수백억에서 수천억원 규모의 PF가 부실화하면 충당금과 연체율, 자본비율 등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만큼 여신심사나 리스크 부서가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은행들이 정부 주문에 맞춰 당장 PF나 부동산·임대업 대출을 크게 늘리기도 쉽지 않다. 은행은 연초 업종별 여신 익스포저 한도를 미리 정해놓고 관리한다. 임대업 대출을 연간 10%만 늘리기로 했다면 중간에 해당 한도가 소진될 경우 신규 취급을 중단하는 식이다. 실제 주요 은행들은 8·13 대책 이후에도 생산적 금융의 내부 분류 기준을 별도로 변경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됐다.
주택공급 부족의 원인을 금융에서 찾는 것 자체가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울 등 수도권 핵심 지역의 주택공급이 부족한 원인은 PF 자금 부족보다는 신규 택지 부족과 재건축·재개발 인허가, 사업성 등에 있다는 것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금융이 실물을 앞서갈 수는 없다"며 "금융기관이 PF를 해주지 않아 아파트 공급이 안 되는 상황은 아니다"고 했다.
반면, 정부의 정책 방향이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기존 주택을 사고파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출과 신규 주택을 실제로 만들어내는 건설·PF 금융은 경제적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신규 주택 PF는 토지 매입과 공사, 고용을 유발하고 최종적으로 주택 공급을 늘린다는 점에서 생산성이 있는 금융으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한 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말하는 것은 기존 구축 주택의 거래를 위한 대출은 계속 관리하되 신축 주택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금융은 충분히 공급하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며 "다만 신축 공급이 늘어나면 결국 중도금·잔금대출로 이어지기 때문에 가계대출 증가 압력이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은행권에서는 정부가 생산적 금융이라는 중장기 정책 목표와 당장의 주택공급 확대라는 단기 현안을 동시에 추진하려면 보다 명확한 교통정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주택공급 금융과 생산적 금융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구체적인 인정 기준까지 제시해야 정부의 정책 주문이 은행권의 실제 여신 전략 조정과 자금 집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