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확산으로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공급 부족이 2028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수자이 시바쿠마르, 찰스 웨스너, 토머스 하웰 미국혁신재건 프로그램 연구원들은 최근 '메모리 사이클을 넘어: AI, HBM 그리고 새로운 반도체 부족(Beyond the Memory Cycle: AI, HBM, and the New Semiconductor Shortage)' 보고서를 통해 "현재 메모리 부족은 단순한 호황·불황 주기의 반복이 아니라 AI 수요가 시장 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결과"라며 "이러한 글로벌 메모리 부족 현상은 대규모 신규 생산시설이 가동되는 2028년까지 지속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보고서는 최근 반도체 공급 부족의 핵심 원인으로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지목했다. 생성형 AI 확산으로 대규모 데이터센터 투자가 급증하면서 AI 가속기에 필수적인 HBM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었기 때문이다. HBM은 일반 D램과 생산설비와 웨이퍼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데, HBM 생산이 늘어나면 스마트폰과 PC, 자동차 등에 사용되는 일반 D램 생산능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글로벌 메모리 산업이 소수 기업에 집중돼 있다는 점도 공급난을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현재 세계 D램 시장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 마이크론 등 '빅3'가 전 세계 D램 매출의 90.5%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3사가 생산능력과 투자를 HBM과 AI용 서버 메모리에 집중하면서 일반 D램과 낸드플래시 등의 공급은 상대적으로 위축됐다는 설명이다.
보고서는 이러한 변화가 기존 메모리 산업의 경기순환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평가했다. 메모리 반도체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으로, 수요가 증가해 가격이 오르면 기업들이 대규모 증설에 나서고, 몇 년 뒤 신규 생산시설이 가동되면서 공급 과잉과 가격 폭락이 나타났다. '가격 상승→투자 확대→공급 과잉→가격 하락'의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메모리 공급 부족은 이러한 사이클을 변화시켰다는 분석이다. 2024년 초 메모리 시장은 재고가 쌓이고 가격이 하락하는 공급과잉 국면에 있었다. 그러나 생성형 AI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하면서 HBM과 서버용 D램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보고서에 따르면 빅테크 기업들의 데이터센터 관련 투자는 2024년 2170억 달러에서 2025년 3800억 달러로 증가했고, 올해는 65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AI발 메모리 부족 현상은 소비자 시장으로까지 번지고 있다는 평가다. DDR4 메모리 가격은 2025년 이후 700~800% 상승했다. 이로 인해 2026년 스마트폰 평균 판매가격은 14% 올라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자동차용 D램 가격도 신규 계약을 기준으로 70~100% 상승할 것이란 의견도 제시됐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AI 산업의 성장이 고성능 메모리 수요를 끌어올리는 동시에 다른 산업의 반도체 조달 비용을 높이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러한 메모리 공급 부족 현상이 당장 해소되긴 어려울 것으로 봤다. 통상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는 데 약 150억~200억 달러가 소요되며 완공까지 최소 2~3년 이상이 걸린다. 공장 설립 후에도 장비 설치와 공정 안정화, 수율 확보가 필요해 실제 시장에 공급하기까지는 추가 시간이 필요하다. 최근 반도체 빅3는 생산력 확대에 나서고 있지만 신규 생산시설 대부분은 HBM과 차세대 DDR 등 고성능 메모리에 집중돼 있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본격적인 시장 공급이 가능해지는 시점은 2028년 이후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메모리 산업 확장은 중요한 변수로 꼽힌다. 현재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세계 D램 시장의 8%를 차지하고 있으며, 양쯔메모리(YMTC)는 세계 NAND 출하량의 약 13%를 차지한다. 반도체 빅3가 수익성 높은 HBM에 집중할수록 중국 기업들은 일반 D램과 낸드 시장에서 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중국 업체의 공급 확대가 글로벌 메모리 부족을 완화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과잉생산과 저가 공세, 무역마찰 초래, 중국 의존도 심화 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저자들은 AI 시대 기술 경쟁에서 HBM과 일반 D램뿐 아니라 첨단 패키징 능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HBM 생산에는 첨단 D램 제조기술 외에도 반도체 적층과 패키징, 수율 관리, 고객사 인증 등 복잡한 생산기술과 공급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러한 역량을 동시에 갖춘 국가와 기업의 전략적 중요성도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했다.
저자들은 "현재의 메모리 부족은 단순한 가격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생산능력이 AI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신호"라며 "향후 반도체 산업의 핵심 과제는 메모리 시장을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공급망 병목을 줄이고 생산능력과 첨단 패키징 역량을 확대하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