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부실한 지침 속 흩뿌려진 100억원

최우영 기자
2026.09.10 05:00

[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삭족적리(削足適履). 신발 사이즈에 맞춰 발을 잘라낸다는 뜻이다. 비현실적인 제도에 맞춰 현실을 억지로 욱여넣는 삭족적리 사례는 왕왕 발생한다. 17세기 영국에서 창문 개수로 주택세를 매기자 사람들은 창문만 벽돌로 막았다. 구소련에서는 못 생산 성과를 무게로만 측정하니 산업 현장에서 써먹지도 못할 거대한 못만 만들었다. 때로는 지침과 성과측정 지표가 결과를 만든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시행 중인 '모두의 창업'은 1기 1차 합격자 5000명에게 각 200만원씩의 창업활동자금을 줬다. 재료구입, 외주용역비, 문헌구입, 지급수수료, 여비·회의비 등에 폭넓게 쓰라고 열어줬다. 일시불로 50만원만 넘기지 않으면 멘토 기관의 승인 없이도 자유롭게 지출이 가능하다.

정작 자금을 받은 1차 합격자들은 사용 지침이 현실과 거리가 멀다고 아우성이다. 한 참가자는 지역 멘토기관에 찾아가기 위해 KTX나 고속버스를 타야 하는데 '취소 시 수수료가 부과된다'는 이유로 결제를 못했다. 50만원 미만의 노트북을 사려던 이는 '재산성 물품'이라는 이유로 가로 막혔다. 시제품 제작용 재료를 온라인 쇼핑몰에서 살 수도 없다. 모든 온라인 결제가 원천적으로 봉쇄된 탓이다. 발품을 팔며 오프라인 매장을 돌아다녔다는 하소연도 이어졌다.

이 와중에 8월 31일까지 쓰지 않은 자금은 모두 회수된다는 공지가 떴다. 중기부는 자금 집행 내역을 다음 라운드 평가지표에 반영한다고도 했다. 참가자들은 두달 남짓한 기간 동안 200만원을 빨리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만만한 건 역시 '여비·회의비'다. 단거리도 택시를 타고, 고급 맛집을 찾아 다니며 창업자금을 빠르게 썼다는 '간증'이 쏟아졌다. 정작 창업에 필요한 곳에 돈을 쓰지 못하니 그대로 '200만원짜리 법인카드'가 된다.

진정 필요한 출장이었는지, 창업을 위한 미팅과 식사에 사용된 밥값·술값이었는지 사후 관리감독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현재로써는 그럴 계획이나 역량도 부족하다. 허술한 사용지침 속에서 총 100억원의 창업자금이 본래 목적에 맞게 쓰였을지 의문이다. 올해 두번째 모두의 창업에선 1라운드 진출자를 1만명으로 늘려 총 200억원을 또 이렇게 나눠준다. 내년에는 1인당 금액을 500만원으로 늘린다. 1라운드에 2만명을 더 뽑는다니 1000억원이 또 이렇게 쓰일 지경이다.

연초 '국가창업시대'를 선언한 이재명 대통령은 "2차·3차·N차 모두의 창업도 기대한다"며 매년 반복 시행을 예고했다. 지금이라도 허술한 지침을 정비하고, 향후 부정사용을 어떻게 잡아내고 회수할지 고민을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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