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세상을 뒤집은 편지한통…24년간 침묵한 한국

김유진 기자
2015.08.22 03:24

[따끈따끈 새책]'나는 고발한다'…끝나지 않은 '드레퓌스 사건' 집단히스테리현상 극복도 과제

“나는 한 정직한 인간으로서 온 힘을 다해 큰소리로 진실을 외칩니다. 진실은 지하에 묻혀서도 자라납니다.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허위를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1989년 1월13일. 프랑스 조간신문 ‘로로르’ 1면에는 기사가 아니라 긴 편지 한 장이 게재됐다. 수신자는 프랑스 대통령, 발신자는 당시 베스트셀러 작가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던 에밀 졸라, 제목은 ‘나는 고발한다’였다. 19세기 말 여론을 양 극단으로 분열시킨 이슈였던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촉구하는 이 글은 프랑스 전역을 발칵 뒤집었다.

이 사건은 1894년 10월, 프랑스 참모본부에서 일하던 유대인 출신의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 대사관에 군사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외딴섬에 유배되며 시작된다.

유일한 증거는 드레퓌스의 필체였다. 독일대사관에서 빼내온 정보 서류에 있던 필적과 유사하다는 군 장교의 판단 때문이었다. 재판 과정에서 드레퓌스에게는 항변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언론은 그를 매국노로 몰았다. 당시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던 반유대 정서 또한 더욱 강화됐다. 군부는 진범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는 확증을 발견하지만 이를 은폐했다.

그런데 군대 내에서 장래가 촉망되던 젊은 청년 피카르 소령의 내부고발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그는 무고한 드레퓌스가 억울하게 고통당하는 것을 볼 수 없어 상관과 충돌했다. 양심적인 정치인, 법률가, 문인들이 활동을 시작했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고 재심을 요구하던 가족은 진범으로 알려진 헝가리 태생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했다. 에스테라지 또한 본인이 진범이라고 자백했다. 그러나 프랑스 군부는 형식적인 재판을 한 뒤 진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당시 여론에서 재심 반대파가 다수였기 때문이었다.

소수의 양심 있는 자들이 재심을 외치고 드레퓌스 사건의 진실을 알고자 했으나 이미 유대인에 대한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혀있던 대중은 진실에는 관심이 없었다.

에밀 졸라는 이 글 한 편으로 자신이 이룬 모든 것을 걸고 싸움을 시작했다. 파리의 군중은 “에밀 졸라를 죽여라! 유태인을 죽여라!”며 유혈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펜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소극적이었던 프랑스의 양심 있는 소수 지식인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 결국 재심에 대한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기소된 지 12년 만에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드레퓌스에 대한 모든 유죄 판결이 오판이며 무효라고 판시했다. 국회도 ‘프랑스의 양심을 해방하자’는 뜻으로 드레퓌스를 프랑스 육군으로 돌려보내는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책 ‘나는 고발한다’는 에밀 졸라의 투서를 중심으로 드레퓌스 사건의 전말을 훑어본다. 부제처럼 집단히스테리가 어떻게 진실을 외면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지금 책이 나온 걸까. 기자 출신 역자는 “드레퓌스 사건은 비록 서양의 역사고 지난 시대의 일이지만 오늘 우리의 현실과도 와 닫는다”고 말한다. 지난 5월, 24년 만에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되며 억울한 누명이 벗겨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이 떠오른다. 이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려 왔다.

우리 사회는 집단히스테리로부터 자유로운가. 에밀 졸라처럼 양심을 내걸고 정신 못 차리는 사회를 향해 호통 칠 지식인이 있는가. 우리 사회가 100여년 전 프랑스 사회보다 진보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책을 덮을 때쯤이면 여러 가지 질문이 머리 속을 복잡하게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발한다=니홀라스 할라스 지음. 황의방 옮김. 한길사 펴냄. 496쪽/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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