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천년고도 경주 '월성'에 담긴 2000년의 사연을 캐다

경주=김유진 기자
2016.04.03 07:57

신라 4대 왕 파사이사금 22년(101년)부터 멸망 935년까지 왕궁으로 사용된 '월성(月城)'

800년 동안 신라 왕궁으로 사용된 경북 경주 월성을 위에서 내려다 본 사진. /사진제공=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북 경주 월성 발굴 현장 모습. /사진제공=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신라본기' 헌강왕 6년 기록 중에서)

18만 호의 집에 사람이 살던 대도시. 천년의 세월 동안 왕국을 유지해 온 신라의 중심에는 달을 닮은 성, '월성(月城)'이 있었다. 파사이사금 22년이던 101년 새로 쌓은 이 성은 신라가 멸망하던 900년대 중반까지 왕궁으로 기능하며 신라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봤다.

신라가 고려에 멸망한 뒤, 패한 왕가가 피난을 가버린 빈 궁터는 하루하루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월성은 이후 일제 강점기가 도래하기까지 약 1000년의 기간에 대한 기록도, 흔적도 전혀 없는 특이한 장소가 됐다.

이미스터리한공간을 지난달 말 찾았다. 2014년 12월 시굴조사를 한 뒤 지난해 3월 본격적으로 정밀발굴조사에 착수해 약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수십 명의 연구원이 곡괭이로 조심스레 유물을 파내고 있는 22만㎡의 황량한 부지에서는 당시의 생활상을 추측할 수 있게 하는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었다.

경북 경주 월성 발굴현장에서 발굴된 토기들. /사진제공=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8세기 동안 쌓인 세월의 더께

신라의 왕궁이었던 월성의 자리에는 황량하게 넓은 공터만이 남아있었다. '삼국사기' 등 기록에 의하면 이곳은 원래 바다를 건너온 일본인 '호공'이 살던 집터였다. 신라의 4대 왕 석탈해가 인근의 산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다 초승달 모양인 이 땅을 발견했고, 길한 땅이라 여겨 호공으로부터 빼앗은 것.

이후 석탈해가 부지의 동남쪽에 토성을 높이 쌓아 만든 월성은 800여 년 동안 신라 왕들의 궁궐로 쓰였다. '술을 마셨다' '월성 내 천존고에 대나무로 만든 피리(만파식적)를 보관했다.' 등 이곳에서의 왕들의 생활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그러나 왕이 이곳을 정확히 어떤 용도로 사용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에 없는 만큼, 그 부분을 밝혀내는 것은 후대의 몫이 됐다. 다행히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월성 내부 지하 레이더 탐사를 한 결과 대형 건물터가 배치된 곳이 4곳 발견됐다. 연구소는 이 4곳을 왕이 집무하는 정전(正殿)과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寢殿) 등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날 발굴현장에서 만난 이종훈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관은 "월성 중앙 부근의 땅을 깊이 2.3m까지 파 그 안에 있는 유물로 시기를 분류한 결과 총 9개로 나뉘었다"며 "800여 년 동안 사람들이 살면서 사용하던 도구 등 생활 양식이 달라진 것이 그대로 층 안에 쌓여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랜 세월이 쌓여있는 만큼 발굴 작업을 어느 시대까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필요해 보였다. 심영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장은 "전 지역에 걸쳐 토층별로 시대가 다른 유물들이 묻혀있기 때문에 어느 시대까지를 어떻게 발굴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앞으로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결정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비어 버린 천 년의 기록은 어디서 찾을까

연구원들은 신라 1000년의 역사를 가진 월성이 재미있는 또 하나의 이유가 바로 신라 멸망 이후의 1000년의 공백 때문이라고 말했다. 인근에 17만8936호의 민가가 살고 있던 풍요로운 왕궁이었던 월성은 신라가 고려에 멸망한 뒤 텅 비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후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이 곳에서 본격적으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면서 그 1000년의 흔적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지난 1년간의 발굴 조사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어떠한 흔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이 학예연구관은 "고려나 조선시대에 들어서서 이 부지를 사용한 흔적이 전혀 없고, 인근 구전 설화나 남아있는 관련 기록도 없다"며 "1000년 간의 공백이 미스터리한데, 아마 고려나 조선 사람들이 옛 궁궐터라 하여 신성시 여기며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농사를 짓던 흔적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던 빈 왕궁은 조선 말,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삼베 밭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성 안 일부 지역에는 민가가 들어와 집을 짓고 살기도 했던 사진이 남아있다.

1979년 박정희 정부가 땅 전체를 매입해 발굴조사를 시작했고, 성벽과 방어시설인 해자 등 일부를 확인했다. 이후 박 정권이 무너지고 약 50년 동안 지지부진했던 월성 발굴조사는 최근 다시 시작됐다.

심 소장은 월성 발굴조사 완료 시점에 대해 "20~30년 후가 되지 않을까 한다"고 답했다. 땅속에 묻힌 신라의 1000년, 그리고 잊혀진 그 이후의 1000년을 찾아내는 작업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는 "올해는 이 지역이 '월성'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벽과 해자를 정비 복원할 계획"이라며 "그 이후에 월성 내부 유물을 조사해나갈 계획이며 그 작업은 꽤 오래 걸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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