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붓끝에 내 꿈을 실어도 되겠느냐? 네가 내 눈과 귀가 되어 서민들의 숨결을 빠짐없이 그려오라."
조선의 22대 왕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이었던 정조 임금. 피바람으로 시대를 정리한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를 딛고, 조선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그는 민심을 '그림'을 통해 들여다봤다. 살아 움직이는 듯, 표정과 행동에서 생동감이 넘치는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서 백성들의 삶을 접한 것이다.
정조와 김홍도 두 사람은 개별 인물로는 널리 알려졌지만, 이들이 하나의 팀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잘 모른다. 500년 조선 역사상 최고의 예인정치를 펼친 정조의 남자, 김홍도는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지만 그의 일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행적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그림은 오로지 '회화'로서만 평가를 받아왔다. 이것이 안타까웠던 저자 이재원은 '조선의 아트저널리스트, 김홍도'를 통해 정조가 정치하는 데 필요한 '민생 보고서'를 만든 훌륭한 신하로서의 김홍도를 조명했다.
이 책은 어린 김홍도가 강세황이라는 훌륭한 화백을 찾아가 '제자로 삼아달라'고 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허필, 심사정 등 당대의 쟁쟁한 화백들을 스승으로 삼으며 스승을 뛰어넘는 화백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동시에 임금 영조가 자기 아들이었던 세자로부터 마음을 거두고, 어린 세손이 영조에게 '아버지를 살려달라'며 애처롭게 간청하는 안타까운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던 1765년, 마침내 열 네 살의 정조가 연회 의궤 행사도를 그리기 위해 궁중에 들어온 스물한 살의 김홍도를 만난다. "그대가 김홍도인가." "인사드리옵니다. 세손 저하! 화원 김홍도라 하옵니다." "붓끝이 예리하구나." 서로를 탐색하는 첫 만남의 끝은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경현당수작도'라는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영조가 붕어한 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정조는 화원 김홍도를 불러들인다. 창덕궁 인정전 후원에 규장각을 지어 자신의 개혁 이념과 방향을 명확히 하고, 김홍도가 이 그림을 '규장각 조망도'로 남기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이후 임금의 백성을 위하는 깊은 뜻을 알았던 화원은 임금을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정조가 왕위에 오른 것을 경하하는 의미의 '군선도'를 그린다.
"전에 없는 대작이로구나. 과연 김홍도답다." "과찬이시옵니다. 소인은 단지 '군선도'를 그려서 보위에 오르신 전하께 경하드리고 싶었사옵니다." "그대의 신필을 빌려 신선들의 세계를 마음껏 노닐고 또한 경하까지 받으니, 오늘만큼은 적적하지 않구나."
이 두 명의 천재의 '팀워크'는 나날이 발전해간다. 김홍도가 부채 위에 그린 '서원아집도'를 본 뒤 은밀하게 그를 부른 정조는 비단을 하사하며 그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정조는 김홍도가 여행 풍속인 '행려풍속도'를 그렸다는 소문을 듣고 보기를 원했다. 그림을 본 정조는 깜짝 놀라며, "내가 보고 싶었던 그림들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외친다.
자유로이 궁 밖을 출입할 수 없는 임금의 처지에서, 백성들이 어찌 살아가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했던 것. 풍속도 속에는 백성들의 삶 그대로가 녹아있을 뿐만 아니라, 세태에 대한 익살스러운 풍자까지 담겨있었다. 이날부터 김홍도는 임금의 눈과 귀가 되어 바깥세상을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삶을 그대로 전달하게 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와 그 천재를 알아본 임금이 만들어 낸 환상적인 팀워크가 이 책을 보는 내내 미소를 거둘 수 없게 한다. 기록과 남아있는 그림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생생한 대화들이 마치 한 편의 소설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기존의 기록에 나름의 픽션과 창작을 가미해 이야기를 전개했다는 저자의 노력이 빛을 발한다.
◇조선의 아트 저널리스트, 김홍도=이재원 지음. 살림 펴냄. 496쪽/ 2만 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