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잔 돌리는 건 무당들이 하는 거지. 정한수 떠놓고 '비나이다 비나이다' 할 때 하는 거야. 유교는 기복신앙이 아닌데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니깐. 선대를 향한 추모의 의미, 그게 제사의 본질이야."
이기전 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 종묘제례 보유자(84)는 조선시대로 따지면 '예조판서'다. 지난 1일 서울 종로구 종묘에서 거행된 '종묘대제'에서 그가 제사 집례자인 전례이사로 나선 이유다. 그가 낭창한 목청으로 창홀(唱笏, 제사절차를 읽음)하면 수백 명의 전관이 정해진 예를 따른다.
그는 40대 중반까지 자신이 인간문화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처음으로 등재된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 종목의 보유자 2명 가운데 한 명이지만, 40대까지는 충북 청주시에서 장사하던 평범한 가장이었다.
"충북 괴산군의 한 시골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중학교를 가야 하는데 가장 가까운 중학교가 70리밖에 있는 거야. 유학을 갈 형편도 안 되니 중학교를 포기해야 했지. 그런데 일은 하기 싫고…. 해서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어."
그렇게 14세에 배우기 시작한 한문은 쏙쏙 머리에 들어왔다. 사서삼경을 줄줄 욀 정도였다. 그러나 시대는 격변했고 한문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보였다. 가방끈 짧은 청년은 그렇게 군대를 제대하고 고향이 아닌 청주시로 무작정 떠났다. 그렇게 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생각보다 잘 됐다. 아이 다섯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며 살고 있던 어느 날. 족보 작업을 한다며 전주이씨종약원에서 그를 불렀다. 아무 생각없이 찾아간 종약원에서 그는 종묘제례 2대 인간문화재 고(故) 이은표 선생을 만났다.
"문서를 내놓길래 아무 생각 없이 줄줄 읽었지. 그랬더니 선생이 '너 한문 좀 읽었냐'며 빤히 보시더라고. 나중에 '나 좀 도와달라'고 연락이 왔어. 30년 동안 한문을 잊고 장사만 하며 살던 내가, 초등학교밖에 졸업 못 한 내가 인간문화재가 될 줄 누가 알았겠어.(웃음)"
종묘제례 업무에 발을 들인 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창덕궁 후원의 규장각이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등 고문헌을 하나하나 넘기면서 제사를 비롯해 국가의 예법을 익혔다. 다만 일제에 강탈당한 책이 너무 많아 아쉬웠다. 남아있는 문헌에도 페이지마다 조선 총독부의 도장이 찍혀있었다.
그렇게 문헌을 통해 그는 국내 수많은 제사를 되살려냈다. 서울 종로구 사직단에서 하는 사직대제, 중구 환구단에서 하는 환구대제 등 사라졌던 수많은 제사가 그의 손에 의해 부활했다. 종묘제례를 포함해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제사에도 빠지지 않고 집례자로 참석했다.
이 보유자는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사서삼경과 조선의 예를 배워 온 그가 보기에, 대한민국에서 열리는 수많은 제사 전통에 잘못된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 그는 지금까지 700여 명의 제자에게 조선왕실의 제례법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민가의 법도를 가르쳤다.
"반절도 대표적으로 잘못된 제사법이야. 요새 사람들이 절을 두 번 하고 나서 마지막에는 허리만 숙이는데, 그런 건 우리나라 법도에 없어. 큰 아들이 향을 꽂고 둘째, 셋째도 이어서 꽂는 것도 잘못이야. 한 번만 해야지. 이렇게 잘못된 제사 관행들을 바로잡는 것이 내 마지막 숙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