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폭력의 희생자들에게 보내는, 흑인 아버지의 편지

박다해 기자
2016.09.10 10:12

[따끈따끈 새책] 2015 전미도서상 수상작 '세상과 나 사이'

"나는 열다섯 살 너에게 이 글을 쓴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에릭 가너가 개비 담배를 팔았다는 이유로 목이 졸려 죽는 것을 네가 본 게 바로 올해였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고 설사 예전에는 몰랐다 해도, 네 나라의 경찰에게는 네 몸을 파괴할 권한이 주어져 있다는 걸 이제 너는 똑똑히 알게 되었어." (18~19쪽)

이토록 애정 어리면서도 무거운 편지가 또 있을까. 아프리카계 미국인 타네하시 코츠는 15살의 아들에게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편지의 형식을 빌어 이야기한다. 2015년 미국사회에서 파문을 일으킨 책 '세상과 나 사이'다.

코츠가 아들에게 편지를 쓴 것은 이제는 아들도 미국에서 살아가려면 "적절한 권한 없이 담배를 팔았다가는 몸이 파괴될 수 있"고 "몸을 옭아매려는 사람들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가도 몸이 파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흑인 노예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지 수백 년이 지났고, 대표적인 흑인 운동가 마틴 루터 킹이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연설을 한 지도 수십 년이 흘렀지만 미국의 인종차별은 현재진행형이다. 흑인 대통령이 재임했음에도 여전히 미국의 공권력은 흑인을 대상으로 폭력을 일삼는다.

코츠는 장문에 걸친 편지를 통해 미국의 인종주의와 민주주의의 허상을 파헤친다. 그는 오늘날 미국에서 벌어지는 흑인 살해가 단순히 몇몇 인종주의자나 극단주의자들의 돌발 행동이나 아니라 노예제를 통해 부를 일군 미국의 유산과 전통에서 찾는다.

그는 계속되는 차별이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노예제 시절 흑인이 곧 '부'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에서 원인을 찾는다. 이미 권력을 쥔 백인들은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위 계층을 만들어야만 했다는 것.

학교에서는 마틴 루터 킹과 같은 영웅을 기념하는 동시에 백인에게 '순종하는 흑인상'을 가르친다. 그들의 몸을 억압하고 주기적인 살해와 폭력을 통해 흑인이 스스로 자신들의 위치를 자각하게 만든다는 설명이다.

코츠는 '백인'이 '스스로 백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꼬집는다. 그들도 '백인'으로 범주화되기 전에는 결국 '코르시카인, 웨일스인, 유대교도' 등 각기 다른 존재였다는 것이다. 다만 흑인들에게 가해지는 '호된 채찍질'과 '팔다리에 채운 사슬'을 통해 자신들을 하얗게 '세탁'할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백인 사회가 만들어 놓은 철창 안에서 흑인 남성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를 가감없이 담아낸다. 애초에 미국에서 흑인은 한 번도 '국민'이었던 적이 없었다. 흑인들은 백인이 지배하는 문법 속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스스로 몸을 움츠리고 '두 배는 더 잘해야 한다'는 무의식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는 아들에게 차분히, 하지만 숨기지 않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백인의 기준에 맞춰 성공한 흑인들조차 어느 순간 미국의 '유산'으로 내려오는 인종주의 폭력에 몸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을.

"내 어린 시절에 볼티모어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건 이 세계의 비바람 앞에서, 그 모든 총과 주먹, 부엌칼, 강도, 강간, 질병 앞에서 알몸으로 버텨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31~32쪽)

그는 마지막 장까지 끝내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무작정 다 괜찮을 거라고, 좋아질 거라고 아들을 위로하지 않는다. 투쟁하면 얻을 수 있다고 격려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만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냉정하게 말한다.

"사모리, 아빠는 우리가 그들을 멈출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그들은 스스로 멈춰야 하기 때문이야." (227쪽)

대신 아들에게 깨어있으라고, 누구의 기준에 맞춘 삶이 아닌 흑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라고 이야기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추천사에서 "세상은 기울어져 있고 나는 언제나 내 위치를 바꿀 수 있다. 그 변화는 현재의 자기 위치를 인식하고 유동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며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모든 인간의 이야기"라고 했다.

정희진이 이야기했듯, 이 책은 비단 '미국의 흑인' 이야기만은 아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내재한 구조적 차별에 짓눌린 이들, 한 사회의 소수자와 비주류 모두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위 계층을 구분 지으며 권력을 공고히 하고 무의식적으로 '순종'하기를 주입하는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 세상과 나 사이=타네하시 코츠 지음. 오숙은 옮김. 열린책들 펴냄. 248쪽/1만 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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