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가장 불편한 것이 인터넷이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인터넷 환경에 적응할 때 역설적으로 삶이 눈에 보인다. 경제통합체 유럽연합(EU)은 지금까지 인간의 삶을 급격히 바꾸는 신산업에 적응하기보다 기존 산업의 보호주의 정책으로 ‘문화적 울타리’를 유지하려는 기조가 강했다.
미국에 디지털 경제 주도권을 내어준 EU는 지금 잇따른 경제위기에 시달리고 있다. 생존의 돌파구는 이제 신산업에 ‘적응’하는 것이다. EU가 2020년을 목표로 적극적인 디지털 성장 전략을 추진한 배경에는 이 같은 위기의식이 반영됐다.
EU는 디지털 성장전략의 정식 명칭을 ‘디지털 어젠다’(DAE)로 정하고 2020년 유럽 디지털 단일시장의 완성을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 1~3차 산업혁명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전략인 셈.
하지만 EU가 미국이 주도하는 디지털 시장을 마냥 좇아가는 것은 아니다.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한 신산업이 성장하면서 기존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문제점과 과제와 부딪히자 EU는 디지털 기업들의 사업활동이 발생시키는 사회적·윤리적 문제점과 불공정한 경쟁환경을 바로잡겠다며 규제도 강화하고 있다. ‘보호’와 ‘개방’의 이중 전략을 통해 ‘두 얼굴의 시장’을 갖추겠다는 것이 EU의 속내다.
이 책은 연세대와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지난 7년간 한국과 EU의 경제 활동에서 파악한 ‘EU 경제 미래’의 모든 것을 담았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미국 경제가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회복하는 반면, EU 경제는 금융위기와 재정위기를 잇따라 겪으며 저성장과 고실업이라는 부진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고 연세-SERI EU센터는 진단했다.
EU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양면작전을 구사한다.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글로벌 디지털 기업의 규제를 통해 일자리와 시장을 지키는 방어전략을 펼치는 한편, 창조경제의 기반인 ICT 산업 육성을 통해 취약한 디지털 경쟁력을 제고하는 디지털 어젠다를 성장전략으로 추진하는 것이다.
책은 우선 EU 경제의 위기가 당초 예상보다 심각해지고 장기화, 고착화한 근본 원인을 유로 지역의 태생적 한계(내재적 측면), 거버넌스 부재(정책대응 측면), 산업경쟁력 약화(산업구조적 측면) 등 세 가지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또 디지털 어젠더의 추진 배경과 법·제도를 정비하는 작업인 디지털 단일시장 완성, 인프라 확충에 해당하는 고속 브로드밴드 구축, ICT 산업경쟁력 확보를 위한 연구개발 투자 확대라는 세 가지 측면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이와 함께 EU 정책의 실제적 대상인 미국과 중국 디지털 기업들의 대응전략은 무엇인지도 살펴본다.
최근 영국의 EU 탈퇴인 브렉시트로 디지털 단일시장 추진에 제동이 걸릴 가능성은 없을까.
저자들은 “영국이 빠지면서 나머지 EU 27개국이 추진하는 디지털 단일시장에 타격이 있을 수도 있다”면서 “하지만 디지털 성장전략에 대한 EU의 방향성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2020 유럽의 미래=연세-SERI EU센터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 304쪽/1만5000원.